인천에 사는 일본인 이노구찌 유우꼬
   
▲ 이노구찌 유우꼬(井口 有子)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이번 일본대지진에서 보여준 한국의 지원은 한·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난 11일, 이노구찌 유우꼬(井口 有子) 인하대학교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급하게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다. 고국인 도쿄(東京)에 거는 전화였다. "뚜, 뚜, 뚜, 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통화 중 신호음이거나 '연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 뿐이었다. 도쿄에 사는 아버지와 오빠, 여동생 누구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일본에 지진이 났다는 데 이노구찌 교수님 집은 괜찮은가요?" 앞서 잘 알고 지내는 한국인이 이노구찌 교수에게 처음 귀띔을 해줬을 때도 그다지 걱정한 편은 아니었다. 도쿄에서 태어나 줄곧 성장하는 동안 많은 지진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언론에 보도되는 지진 피해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지진 첫 날은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결국 그 다음날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도 큰 피해가 없다는 얘길 들었지요."
좀처럼 집에 전화를 걸지 않는 그이지만, 요즘은 틈나는대로 전화를 걸고 있다. 지진 피해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나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인지, 이제 큰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어려운 점이라고 한다면 하루 3시간 정도 정전이 되고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또 슈퍼마켓에서 쌀, 라면과 같은 식료품이 바닥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 질서의식이 뛰어난 사람들로 알려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미하나마 '사재기'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국민들은 여전히 매우 침착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2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인들은 원래 줄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웃음). 줄 서서 기다려도 내 차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 같은 것을 갖고 있어요. 규칙을 지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일종의 신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기다리면 바보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노구찌 교수는 "일본인들은 답답하고 고지식할 정도로 질서를 잘 지킨다"면서도 "동네에 따라 사재기를 하는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질서를 잘 지키는 일본이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6천~6천600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로부터 학살을 당했다.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한국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관동대지진 때는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죽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혼란하던 시기에 반정부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을 주로 죽인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고 인식도 바뀌었습니다. NHK 방송에서 한국인들을 위한 한국어방송을 하는 것만 봐도 시대와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 아니겠어요?"
인식이 달라진 건 오히려 일본이 아닌 한국일 지도 모른다. 한국은 현재 대통령까지 나서서 일본 참사를 애도하고 도움의 손길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다. 이노구찌 교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근래 들어 대지진은 아이티에서도 있었고, 가까운 중국에서도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이 중국을 돕기 위해 특별히 뜻을 모으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일본대지진은 상황이 달라 보입니다. 한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일본을 돕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일본에서 사건이 발생하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는 일본에서 폭풍처럼 불고 있는 '한류열풍' 영향일 가능성도 있다. 한류로 인해 한일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이런 것들이 양국 간 국민정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류팬들의 연령대가 최근엔 이동을 하고 있다"며 "과거엔 아줌마들을 중심으로 한국드라마가 인기 있었는데 지금은 소녀시대, 동방신기, 카라와 같은 아이돌그룹에 일본 소녀팬들이 열광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 음반대상을 받을 정도로 아이돌 그룹은 인기가 높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류 팬들의 세대 간 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일관계가 어깨동무를 한 채 앞만 보고 걷기엔 아직 이른 시기일 수도 있다. 매주 서울 종로에서 수요집회를 여는 일본군대위안부 할머니들은 현재 일본대지진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지진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정부 차원의 공식사과와 피해배상'을 강력히 촉구해 왔다.
"실은 저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시는 나눔의 집에 조금씩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려고 하는데 좀처럼 시간이 안 나 가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정부가 공개사과와 피해배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에서 알아주셔야 할 것은 그 할머니들의 권리를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일본인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이웃임은 확인됐다. 이제 남은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 기대고 살지 않으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이번 대지진이 참혹한 대재앙이지만 이번을 계기로 일본과 한국이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더 배려하는 생각을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이노구찌 교수가 느낀 한국, 인천생활>

이노구찌 유우꼬(井口 有子)씨는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줄곧 도쿄에서 성장했다. 초·중·고를 모두 고향에서 나왔으며, 87년 동경외국어대학교 '조선어학과'에 진학하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 나, 다 …. 대학에서 처음 한국어를 접했지만 그는 현재 한국인 못지 않은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인하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한 것은 2001년 가을이다.
"통역 같은 것을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제가 일했던 사무실에서 '인천에 있는 인하대가 한국학생을 가르칠 사람을 뽑더라'는 얘길 듣고 한국에 오게 됐어요."
이노구찌 교수의 한국생활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신과 같은 '지한파' 내지 '호(好)한파'가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교환학생은 많은데 반해 일본에서 오는 유학생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일본 학생들이 한국에서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한국인들의 영어중시 문화에 대해서도 그는 약간의 불만을 드러낸다.
"동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데, 한국인들은 너무 영어권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