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문화부장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와 그의 아들 최항의 무덤이 발견됐습니다! 고려역사문화재단은 ○일 진강산 자락에서 최우와 그의 아들 항의 무덤을 찾아냈다고 밝혔습니다. 이 무덤에선 청자와 귀금속류는 물론 최우의 일기로 보이는 책자가 함께 나왔는데, 이 자료엔 고려시대 왕실 행사와 강도(江都·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정해 천도했던 1232~1270년) 시대 원나라와의 대외관계, 주민생활상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강화와 남해로 갈려 의견이 분분하던 팔만대장경의 판각지 문제도 종지부를 찍게 됐습니다!"
머잖아 언론에선 이런 보도를 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인천시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가칭 '고려역사문화재단'이(이하 고려재단) 올해 출범 예정이기 때문이다. 고려재단은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사를 연구할 계획이다. 고려왕조의 성격이나 '왕릉', '대장경', '고려청자', '사찰' 등 강화에 남은 역사와 유물을 중심으로 한 인천 강화를 중심으로 한 '고려사'가 연구영역이다. 시는 오는 2018년까지 300억 원의 기금마련을 목표로 현재 인천발전연구원에 용역을 맡긴 상태다. 고려재단의 출범은 늦은 감이 있지만 잘 한 일이다.
고려왕조는 몽골(元)제국과의 항전을 결심하고 1232년(고종19) 개경(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한다. 이후 1270년(원종11)까지 머무는 동안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리움미술관 소장)와 같은 국보급 보물 수십 점을 남겼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심경',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술인 '팔만대장경'도 다 고려시대 나온 것들이다.
고려인은 고고한 심미안과 탁월한 손기술을 가진 세계적 문화민족이었다. 기자는 강화는 물론 수년 전 개성에 가서 목격한 고려유물에서 이런 사실을 충분히 확인했다. 개성은 고려의 수백년 도읍지였고 강화는 39년간 수도였으니 두 곳의 유물에선 똑같은 품격이 흐르고 있었다.
강화에선 지금도 '중성터' 등 새로운 유적지와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 강화 속의 고려사 연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땅을)파면 (보물이)나온다'는 곳이, '지붕없는 박물관'이 바로 강화도다. 이처럼 연구과제가 무궁무진한 상황에서 고려재단이 생긴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란 말이 있다. 역사는 과거사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교훈이란 뜻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길인지 가르쳐 주기도 한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을 보며 우린 초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군사적·외교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배운다. 일제강점기 36년 간을 되돌아 보며 나라를 빼앗기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깨닫는다. 한국전쟁엔 민족상잔의 비극은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역사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사람들은 고려사에 열광해야 한다. 우리 고장 강화가 거대제국 몽골에 맞서 저항한 고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아니던가. 800년 전 강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안다면, 800년 후의 강화와 인천을 내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가 고려재단을 세우는 배경도 이런 이유에서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역사에 대해 꽤 박학다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강화도에 도도하게 흐르는 고려역사의 물줄기를 읽어낸 것이다.
강화도 승천포에선 북한땅 개풍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인다. 고려재단은 처음 강화를 중심으로 한 연구로 시작하겠지만 통일 뒤 강화와 개풍과 개성, 강화와 인천을 잇는 '통일고려사'로 확장할 가능성이 높다. 학술교류부터 이뤄진다면 고려재단이 통일을 앞당기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고려사는 강화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다. 그렇다면 중앙정부는 신라의 수도 경주, 백제의 수도 부여, 마한의 수도 익산과 동등하게 강화를 '고도'(古都)로 지정해야 한다. 시정부와 시의회, 지역 국회의원들 역시 강화도가 고도로 지정되도록 적극 역할해야 한다. 강화의 고려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의 역사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