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대장경을 지킨 사람들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입구.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판전 들어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카메라를 든 사람을 발견하자 벌떡 일어선다. 다른 사람도 함께 들으라는 듯, 그가 큰 소리로 주의를 준다.
 

   
▲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가을날. 방문객들이 해인사 입구를 오가며 가을 정취를 즐기고 있다.


"사진촬영은 금지돼 있습니다. 그냥 구경만 하세요." 남자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해주기도 한다.

"그 경판은 실제 대장경입니다. 관광객들을 위해 꼭 하나만 꺼내 놓았죠. 저 천장 위에 한지가 보이세요? 그 종이들은 대장경을 인쇄한 인경본이죠."

평범한 옷차림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는 자원봉사자다. 지금은 평화로운 표정의 봉사자들이 지키고 있지만, 과거 이 곳은 그렇지 않았다. 지키고 빼앗으려는 사람들의 혈투로 가야산은 온통 피로 얼룩졌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대. 한미연합군에 밀린 인민군들이 가야산에 숨어들었다. 미군사령부는 즉각 가야산 일대에 대한 폭격을 명령한다.

"공비들이 산 속으로 들어갔다, 융단폭격으로 적들을 공격하라!"
 

   
▲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팔만대장경을 지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고 김영환 대령. 후에 장군으로 승진한다. /사진제공=문화재청


가야산을 향해 출격한 비행기 편대는 그러나 해인사 상공에서 돌연 기수를 돌린다. 무전기를 통해 들려온 명령 때문이었다.

"즉각 폭격 계획을 중지하라! 다시한번 명령한다. 모든 대원들은 즉각 공격 계획을 멈추고 선회하라!"

명령을 내린 사람은 편대장 김영환 대령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1951년 9월18일 오전 6시30분. 작전참모 장지량 중령이 해인사 일대를 공중정찰한 뒤 긴급 출동을 명령한다. 전투기 4대가 출동했다. 전투기엔 로켓탄, 네이팜탄과 같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들이 탑재돼 있었다.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에 연막탄 연기가 피어올랐다. 해인사가 잿더미로 변할 뻔한 순간. 김영환 대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각 전투기로 전달됐다.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절 주변 능선을 공격하라!" 김 대령의 명령으로 전투기들이 머뭇거리자 본부에서 재명령이 떨어졌다.

"편대장은 뭘 하고 있나? 해인사를 직접 공격하란 말이다!"
 

   
▲ 장경각 입구에서 판전을 지키는 자원봉사자(오른쪽 아래)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전투기들은 그러나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지 않는다. 대신 몇 개의 능선 너머 다른 곳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그날 저녁. 미 공군 고문단 윌슨 소령이 합동작전본부 장교와 함께 나타났다.

"목표를 알리는 흰 연기를 보지 못했나요? 왜 엉뚱한 지점을 공격한 겁니까!" 미 고문단의 질책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한국 제일의 문화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가 모두 불 타 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변 폭격만 했습니다."

김 대령의 목소리 톤은 잔잔했지만 단호했다. 해인사 폭격 거부사건은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들은 대통령의 결정으로 김 대령은 군법에 회부되지 않는다. 1921년 서울 출생인 김 대령은 경기중학을 나와 공군에 입대한다. 1954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지만, 그 해 3월 비행훈련 사고로 3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오랑캐의 침입, 왜구의 요구, 7번의 화재, 한국전쟁 등 대장경은 역사의 온갖 모진 풍파를 거치면서도 잘 보존돼 왔다. 이는 수많은 백성과 승려들이 몸 바쳐 지켰기 때문이다.


대장경을 가장 탐냈던 나라는 일본이다. 자신들은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때문에 조선초 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대장경을 호시탐탐 노리며 끈질기게 우리 나라를 괴롭혔다. 얼마나 귀찮게 굴었으면, 조선 조정은 한 때 대장경을 몽땅 주어버릴 생각까지 한 적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1414년(태종14), 1423년(세종5), 1437년(세종19)을 비롯, 일본이 조선 초 태조에서 중종에 이르는 140여 년간 대장경을 향한 탐욕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했던지, 조선 정부는 왜구가 귀찮게 굴 때마다 한 두 개씩 줘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이 얻어간 경판은 지금 '난젠지'(南禪寺·남선사)와 같은 일본 사찰 여러 곳에서 보관 중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의 경판을 얻어가지 못하자 약탈음모를 꾸미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선조25)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보름 만인 27일 성주를 점령한다. 해인사와 하루 이틀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왜구가 쳐들어온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이 손에 낫과 창을 들었다.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 해인사에는 만약의 화재에 대비해 자체 소방차가 늘 대기하고 있다.


합천·성주·현풍·거창·고령 등 해인사 인접 군으로 들불처럼 번진 의병들은 가야산에 방어선을 구축한 뒤 왜구들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한다. 의령의 홍의장군 곽재우, 합천의 손인갑과 정인홍, 고령의 김면, 진주의 조종도 등이 당시 의병 대장들이다.

승려들 역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암대사는 승병을 모아 해인사에 접근하는 왜구들을 쳐냈다. 성주성을 거점으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은 마침내 의병들의 대대적 공격에 두 손을 들고 이듬해 철수한다. 일제강점기 역시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으나 스님들의 강력한 반발로 가져갈 수 없었다.

760년 간 대장경이 한 자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는 것은, 이처럼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합천=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해인사 7번의 화재 불구 판전은 무사"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 보존국장 성안스님
 

   
 



"경판을 제작한 고려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장경을 지킨 사람들은 민초들이었습니다. 고려, 조선 때엔 의병과 승려들이, 한국전쟁땐 군인들이 지켰지요. 그들은 대장경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온 몸을 던져 위기를 막아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 보존국장 성안스님은 "팔만대장경은 오래전부터 몽고, 왜구와 같은 오랑캐들의 표적이었지만 8만 여장의 경판은 760년 간 한 자리에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며 "위기의 순간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 된 사람들이 목숨을 건 희생으로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장경은 유럽까지 휩쓴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판각한 보물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목숨보다 소중한 보물을 함부로 빼앗기거나 훼손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여러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판전만은 불에 타지 않은 것 또한 불가사의다.

네 채의 판전건물은 해인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해인사에 화재가 발생하면 옮겨붙을 수밖에 없는 위치인 셈이다. 그런데 20m떨어진 대적광전이 여러 차례 불 탈때 조차 멀쩡했다.

"해인사는 지난 300여 년 사이에만 7차례 큰 불이 났지만 판전은 무사했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대장경을 자손만대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은 지금 모든 국민의 의무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은덕과 국민들의 염원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보존 노력은 각별합니다. 그러나 워낙 귀중한 보물이다보니 부족한 게 많습니다. 더 큰 사랑과 넉넉한 예산이 뒷받침됐으면 좋겠어요."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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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성취론(業成就論)


1권은 인도의 천친이 지은 것을 6세기 중엽 인도의 학승 비목지선이 번역한 것이다.
이 논은 "몸으로 짓는 신업, 입으로 짓는 구업, 뜻으로 짓는 의업 3업 가운데 의업을 중심으로 의식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조작하며 윤희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즉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과 입, 뜻으로 업을 쌓게 된다. 여기서 몸과 입이 범하는 업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뜻에 의한 업을 쌓지 말고 올바른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다음 세상에서 좋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심밀해탈대승경의 게송을 인용해 아다나식의 미세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