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장경의 불가사의
   
 

철커덕.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 보존국장 성안스님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수다라장'의 문을 열어준 것은 해인사를 두번 째 방문했을 때였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어떤 방향으로 기사를 쓴다는 말이죠?"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사진이 있는데 이메일로 보내면 안되겠습니까?"
 

   
 

취재를 요청하는 기자에게 들려오는 성안스님의 목소리는 다소 차가웠다. 앞서 2박3일 일정으로 해인사를 처음 찾았을 때, 사진촬영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온 터였다. 이번 만큼은 꼭 대장경을 가까이서 보고 카메라에 담을 생각으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대장경의 지난 1천 년을 재조명하고 향후 1천 년을 내다보는 기획입니다. 해인사의 보존노력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자손대대로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안스님은 "종무회의를 열어 논의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취재허락을 얻어낸 건 근 열흘 만이었다. 그의 허락은 짧고도 단호했다.
"그 날 제가 일정이 있으니까 시간 맞춰 와서 빨리 찍으세요."
약속 당일. 해인사에 도착한 건 약속보다 1시간30분 빠른 시간이었다. 해인사를 품은 만추의 가야산은 노랗고 붉은 단풍잎들로 뒤덮여 있었다. 사찰에서 '공양'을 하고(절밥을 먹는 것) 장경각 앞에서 스님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다 됐을 때 스님 한 분이 다가왔다. 귀공자의 얼굴을 한 스님이었다.
"아, 인천일보에서 오셨습니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스님이 수다라장의 문을 열었다. 삐이걱. 고려인들이 판각한 대장경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12칸으로 쌓인 빽빽한 목판들, 견고한 장엄함. 가까이서 살펴본 대장경은 창틀 사이로 들여다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으로 오감을 자극했다. 500년을 흐른 고려의 역사. 대장경은 그 도도한 역사만큼이나 장엄하고 찬연한 파노라마로 중생을 압도했다.
"앞으로 수십 년간 못 볼 수도 있으니 많이 찍으세요."
성안스님은 당분간 더 이상 기자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며 촬영을 재촉했다. 며칠을 굶은 사람이 따뜻한 밥상을 앞에 한 것처럼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저 8만여 장이나 되는 경판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대장경판 한 장의 두께는 4㎝. 땅에서부터 8만1천258장을 쌓으면 3천250m의 높이가 된다. 이는 한라산(1천950m)는 물론 백두산(2천744m) 보다 높은 수치다.
경판은 한 면이 아닌 양쪽 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 면에 새겨진 글자는 300자 정도이므로 글자를 모두 합하면 5천만여 자에 이른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 읽는다고 가정할 때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은 4천~5천 자 정도. 경판을 모두 읽으려면 30년은 족히 걸려야 한다.
고려인들이 대장경 제작을 시작해 완성한 기간은 16년 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자가 필요했을까.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목재는 최소한 길이가 1m를 넘어야 한다. 굵기는 40㎝이상 돼야 한다. 길이 1m, 지름 40㎝ 통나무를 가공해 경판을 만들 수 있는 양은 7장 정도다. 그러나 옹이가 박혀 구멍이 있거나 갈라진 나무를 제외하면 기껏해야 너덧장만을 경판으로 쓸 수 있다.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통나무 1만5천 개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이렇게 벌채한 나무는 하루에 한 차례 두 사람이 각판장으로 운반할 경우 연인원 12만 명이 동원돼야 했다.
다음은 원본 쓰기다. 5천만 자에 이르는 경판의 글씨쓰기를 담당한 필생(혹은 필사)들은 불교경전을 일일이 베껴써야 했다. 하루 한 사람이 천 자 정도 썼다고 보면 원본쓰기에는 연인원 5만 명이 참여했다.
필사에 들어간 한지의 양도 상당했다. 8만여 개의 경판에 붙일 종이는 16만 장. 앞뒤로 경판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다가 잘못 쓰면 다시 써야 했으므로 3~4배의 종이를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따지면 종이의 양은 50만~60만 장이 필요했다. 원료인 닥나무를 채취해서 한지를 만들 경우 한 사람이 하루 50장 정도 만들 수 있다. 한지 제작에만 1만 여명의 연인원이 필요했던 셈이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역시 판각이다. 판각은 고도의 기술과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루에 한 사람이 새길 수 있는 판각량은 30~40여 자 정도. 5천만 자를 새길 각수를 연인원으로 산출하면 125만 명에 이른다.
경판을 완성하면 옻칠을 했다. 경판 한 장에 필요한 옻액은 5g 정도. 하루 채취량이 150그루에서 400g이라고 볼 때 대장경판 전체에 필요한 옻액은 400kg에 이른다. 연인원 1천여 명이 동원돼야 한다. 내용을 교정하고 마구리인 구리장식에 참여한 사람까지 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이런 엄청난 대장경을 고려인들을 대체 어떻게 제작할 수 있었을까. 7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장경은 불가사의로 다가온다.


/합천=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대장경을 보관했던 강화도 대장판당 위치를 찾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내년은 강화도에 대장경을 보관한 지 760주년이 되는 해"라며 "대장판당 위치를 찾아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이자 인천시문화재위원이기도 하다.
"강화도와 대장경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1390년대까지 대장경을 보관했던 곳이 강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연구가 덜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현재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김 소장은 학생들에게 강화도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데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팔만대장경 하면 해인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국보가 고려왕조의 강화 천도 당시 만들어졌고 강화 선원사에서 보관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요."
그는 이때문에 "대장경과 관련한 흥미로운 주제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며 "전체가 다 역사교실인 강화도 답사를 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지난 1999년 강화에 연구소를 연 이래 지금까지 강화 연구에 매진중인 그는 2001년 '강화사' 편찬에 중책을 맡기도 했다. 신편 강화사는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내용이 충실해 호평을 받는 책이다.
"대장경은 13세기 세계 최첨단 문화와 최고 학문의 수준을 보여주는 보물입니다. 판각을 어디서 했는가도 규명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장경을 기획하고 보관했던 강화도의 위상과 의미입니다."
김 소장은 "대장경 조조 1천 년을 맞아 인천시민들과 강화군민들이 강화와 대장경에 더 큰 애정과 관심의 눈길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안쪽. 장경각 안에 들어온 관람객들이 창틀 사이로 얼굴을 댄 채 경판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동사간고, 수다라장, 서사간고, 법보전.

도솔천에 있던 미륵보살이 세 번에 걸쳐 이 땅에 내려와서 각각 96억, 94억, 92억의 대중을 교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먼 장래에 더럽고 나쁜 것과 온갖 부정한 것이 없어지고, 산과 강과 절벽이 모두 없어져 평지가 되고, 욕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없어져 사람이 108종의 환난이 없는 시대가 되면 양거라는 법왕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그 때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어 미륵불이 된다. 삼회의 법회로 수많은 대중들을 교화한다고 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