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 여사


 

   
▲ 1959년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죽산 조봉암.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이제서야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의 길이 열리는 듯 합니다."
헌정사상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로 꼽히는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 공개변론이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은 재심 공개변론. 그러나 이날 재심은 1959년 7월30일 재심이 기각된지 51년만이고,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이승만 정권이 정적 제거를 위해 저지른 조작사건'으로 결론내리고 재심을 권고한 지 3년만에 열렸다.
죽산이 1925년 중국 상하이를 근거지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면서 힘겨운 망명생활을 하던 1927년 태어난 죽산의 장녀 조호정(82) 여사는 이날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감췄다. 조 여사는 죽산이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해방 후 제헌의회 의원, 국회 부의장, 대통령 선거 당시 비서로, 감옥에 갔을 때 옥바라지로, 사법살인 후에는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 반세기 만에 다시 열린 재심공판에 대해 재심청구자로 조 여사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겠지만 말을 아꼈다. 재심결정에 이어 재심선고까지, 그리고 앞으로 죽산의 유지가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듯 했다.

 

   
▲ 지난 18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사건에 대한 재심 공개변론이 끝난 후 장녀 조호정(가운데) 여사 등 유족들이 대법원을 빠져나오고 있다. /서울=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진실화해위원회 재심 결정 이후

2007년 9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국가변란의 목적의 진보당 창당 및 간첩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인권유린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과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한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고 죽산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을 인정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권고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정권이 바뀌고 의회 다수당이 바뀌고 또 지방권력이 바뀌었지만 조 여사는 묵묵히 재심을 준비했고 이제 재심결과를 목전에 두고 있다.
100페이지가 넘는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읽고 또 읽어 이제 거의 외우는 수준이라고 조 여사의 가족들은 전한다.
조 여사는 공개변론이 있던 날 머리가 희끗희끗한 죽산의 정치적 동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셔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텐데"라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죽산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죽산의 집을 자기 집 드나들듯 하던 죽산의 정치적 동지들과 후배들에게 대한 각별한 인연을 나타냈다.
"저분들(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없었다면 오늘의 재심이 있었겠느냐"라던 조 여사는 "아버지 덕을 본 사람은 없어도 아버지를 기리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제 많이들 돌아가셨다. 얼마나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법조계에서는 죽산과 관련한 재심결과가 올해 안에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재심이 결국 사법부의 과거청산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개변론에 나섰던 죽산측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양재의 최병모 대표변호사는 "죽산에게 간첩죄를 씌운 유일한 증거라고는 공동피고인 양이섭의 진술밖에 없다. 모든 수사과정 전체가 위법하게 이뤄졌고 이렇게 제출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며 "이 사건 재심은 결국 사법부의 과거청산 문제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인천 그리고 대선, 사법살인

 

   
▲ 지난 7월31일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51주기 추도식에서 송영길 인천시장이 조호정 여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서울=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

조 여사는 상하이의 옛 이름 '호'(扈)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扈'자는 10세기 송나라 시절 이름도 없던 상하이에 붙여진 첫번째 이름으로 지금도 상하이를 뜻한다.
조 여사는 "4살 무렵이던 193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로 강제이감됐다"며 "당시 폐병을 앓던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인천에 왔다가 함께 인천형무소에서 생활하게 됐다. 컴컴한 방에 담요를 쓰고 생활하던 여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강화 친가로 옮겨졌던 조 여사는 1939년 죽산이 신의주 감옥에서 출감하자 현재 국철 1호선 도원역 주변의 부영주택에서 생활하게 된다. 일제 말 일본헌병대의 예비검속과 해방 후 인천건국준비위원회 조직, 공산당 제명, 1948년 제헌의회 출마와 당선 등 파란만장한 죽산의 현대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제헌의회 당선 이후 죽산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 등 농정정책의 초안을 대부분 마련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거처를 서울로 옮긴 죽산은 국회 부의장으로 6·25전쟁을 맞았다.
조 여사는 "인천, 서울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며 "국회 부의장이었으나 공산주의 전력으로 누구도 믿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6·25전쟁으로 어머니가 납북되고 고초는 시작됐다"고 말했다.
전쟁 중 부산정치파동 끝에 발췌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죽산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 소속 정당도 없이 전쟁중에 공산당 경력과 혁신이라는 딱지가 붙었던 죽산은 차점자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떠올랐고 죽산에게 '사신'(死神)이 어른거리는 위험한 고갯길이 시작된 것이다.
온갖 고초 끝에 국회의원 출마마저 저지당했던 제3대 국회,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을 허용하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면서 이승만의 영구집권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죽산이었다.
여당인 자유당은 물론 야당인 민주당도 죽산을 외면했지만 민중은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진보당 창당 이후 선거운동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죽산은 5월 제3대 대선에서 216만표를 얻어 504만표에 그친 이승만 세력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조 여사는 "선거운동했던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100표 한다발 개표용지에 앞뒤에 붙일 이승만 표가 없을 정도로 죽산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들었다"며 "국민들의 지지가 커질 수록 집권세력에게는 위협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마치 짜여진 각본대로 죽산은 사법부 판결에 의해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재심과 남은 과제

올 7월31일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열린 죽산의 51주기 추도식에는 죽산의 정치적 동지 외에도 송영길 인천시장이 참석했다.
현직 인천시장으로는 처음이다.
송 시장은 추도사에서 "죽산의 명예회복과 평화통일의 정신이 후세에 기억될 수 있도록 행정적 뒷받침을 하겠다"며 "조봉암 선생의 한민족의 번영과 평화통일 정신을 기리고 온전한 명예회복을 이뤄야 할 책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송 시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던 조 여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 특히 아버지 고향에 추모비까지 건립해 주고 늘 신경써 주신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을 비롯한 인천시민께 늘 감사할 따름"이라며 "송 시장에게도 감사함을 표했고 앞으로 죽산을 기리는 사업을 하겠다는 말씀에 고맙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심결과와 이후에 대해서는 조여사는 말을 아꼈다.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재심결과에 따라 독립유공자 지정과 그에 대한 평가작업도 남았다.
조 여사는 "정말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셨고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그 뜻을 기리는 사업들을 진행인 만큼 그분들과 상의해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다"며 "반세기 만에 열린 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숭고한 뜻이 후세에 알려지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