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항에 오면, 목적지가 없어도 떠나고 싶어진다. 마중 나갈 사람도 배웅할 사람도 없었지만, 다다는 새벽에 인천공항까지 가본 적이 있다. 영종도를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그는 자신의 차가 그대로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공항 청사에 들어가면서는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는, 지금과는 다른 삶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심장은 언제나 뛰고 있지만, 자신의 심장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다.

   
▲ 머릿속, 생각이 이 복잡할 땐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한결 나은데…. 저 개인전 준비 때문에 오늘 바쁘고 피곤한데, 이 삽화 원고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쏘아 올려보내고, 저도 이 모습처럼 잠깐 쉬어야겠습니다. (김충순, 종이 위에 연필, 볼펜, 수채 색연필, 그림 27.5 X 18.5 cm)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모든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낯선 곳으로 떠나도 그곳이 익숙해지면 익숙함이 주는 나태함과 게으름에 곧 진저리 칠 것이다, 마시다 만 맥주를 이틀 뒤에 냉장고에서 다시 꺼낼 때처럼, 긴장감은 사라지고 차가운 삶의 권태에 지쳐가면서 또 다른 곳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떠나고 다시 떠나는 것을 반복하며 살 수는 없다.
모든 공항이 다 그렇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최피디와 촬영감독은 수화물을 부친 뒤여서 기내로 들어갈 가방만 들고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30시간을 비행해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잘지도 모른다. 촬영감독은 디지털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보며 아르헨티나에서 머문 3주 동안의 사진들을 훑어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다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정말 돌아오실 거죠?"
최피디는 불안한 것이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혼자 남아있는 다다의 안전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촬영한 테이프들을 2주일동안 편집한 뒤 방송 내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출연자의 나레이션 녹음을 해야 하는데, 만약 그때까지 다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으면 방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우나 다른 사람을 써서 나레이션을 녹음할 수도 없다.
"걱정 말아요. 저도 할 일이 태산이라니까요."
"김선생님, 건강하게 잘 지내다 꼭 돌아오세요."
촬영감독은 '꼭'자에 힘을 주고 말했다. 3주 동안이나 같은 방을 썼지만 촬영감독은 여전히 다다를 김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만난지 몇 시간만에 다다라고 편하게 불렀던 초이나, 이틀만에 다다라고 불렀던 라우라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피디까지 다다라고 부를 수 없다. 피디는 피디의 입장이 있고 리포터와 여러 가지 에서 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너무 가까워져도 곤란하다. 일이 얽혀 있으면 편하고 가까워지기 힘든 것이다.
출국 게이트 안으로 그들이 사라지자 다다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들은 떠나고 자신은 남았다. 가르시아가 다다의 어깨를 껴안았다.
"서운하세요?"
다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다다는 비로소 혼자 남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2주의 시간이 더 있는 것이다. 다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을 2주 더 연장하기로 한 것은, 라우라 때문이다. 아니다, 정확하게는 탱고 때문이다.
물론 서울로 빨리 돌아가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믿을만한 후배에게 스튜디오를 맡겼더라도 주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난다. 다다의 대학 후배인 박성택은 일 처리가 정확하고 절대 다다에게 피해를 줄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 주인인 다다가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서 일을 하는 것과, 멀리서 전화로 일 처리를 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체류를 2주 더 연장한 것은, 지금 탱고를 배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탱고를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여기까지 와서 탱고를 배우지 않고 돌아가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았다. 다다의 결정에는 라우라가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 저녁에 초이도 온다고 했어요."
가르시아는 핸들을 잡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말했다. '초이'라는 단어가 가르시아의 입술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무엇인가 다다의 가슴을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 남아있겠다고 결정한 다다를 위해 오늘 저녁 라우라가 작은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탱고 클럽에서 밤을 샌 후 라우라는 촬영 도중 몇 번 더 마주쳤지만, 초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겠다고 결정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2주 동안 머물 숙소를 찾는 문제였다. 촬영하는 동안의 체제비는 프러덕션에서 지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이제는 자비로 머물러야 한다. 비싼 호텔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르시아가 말하는대로 그의 집에 머물기도 불편했다. 다다는 라우라가 추천한 세르미엔토 거리에 있는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장기 체류자를 위한 레지던스 호텔이었는데 비용도 괜찮았고 호텔 시설도 마음에 들었다.
가르시아의 차 트렁크에는 다다의 가방이 실려 있었다. 3주 예정으로 짐을 싼 것이었기 때문에 몇 가지 보충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간단한 것들이다. 속옷은 세탁해서 입으면 되니까 괜찮았지만, 가방도 하나 더 필요했고, 옷도 필요했다. 다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을 때는 3월이었지만 이제는 4월인 것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가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옮긴 후 가르시아는 돌아갔고 다다는 혼자 남아서 샤워를 했다. 욕조에 앉아있는 동안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탱고를 배우겠다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이 가져올 파장 때문이었다. 한쪽을 얻으면 어느 한쪽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세상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진 물의 양은 같은데 한쪽 방에 물을 많이 채우면 다른 쪽 방에 있는 물이 흘러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그 방의 물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스튜디오를 2주 더 운영해야 하는 박성택은 불만을 표시했다. 밀린 프로젝트는 없었다. 스튜디오 일은 한꺼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급한 일은 다다가 다 처리하고 왔기 때문에 지금은 비교적 한가한 시기였다. 통상적인 운영만 하면 되기 때문에 박성택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는 있지만 약속이 틀어진 것을 서운해했다.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페스티벌 행사 사진을 맡았는데, 주말을 이용해서 가면 되니까 큰 지장은 없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파티는 산마르틴 광장과 5월대로가 만나는 플로리다 거리의 카페에서 하기로 했다. 가르시아가 대학시절 알바를 했던 곳이라서 편하다는 것이다. 플로리다 거리는 서울로 말하자면 명동 같은 곳이다. 탱고 클럽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라우라도 그 카페가 좋다고 추천해서 다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플로리다 거리는 언제나 사람이 많다.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명동처럼은 아니지만 600여개의 크고 작은 샵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관괭객들도 많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젊은이들도 많이 몰려든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을 뽀르떼뇨라고 부른다. 서울깍쟁이, 뉴요커, 이런 뜻과 비슷하다. 남미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고 에비타의 전설이 남아 있으며 마라도나의 축구열기가 살아있는,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탱고의 발생지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플로리다 거리에도 탱고 무용수들이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디든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에는 탱고 무용수들이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즉석 공연을 하면서 관람객들에게 돈을 받는다. 모자를 돌리기도 하고, 그들의 발 밑에 놓인 모금함에 관람객들이 직접 돈을 넣기도 한다.
금요일이었다. 파티 시간은 8시였다. 다다는 호텔 로비에 나와서 가르시아를 기다렸다. 파티에 올 사람은 가르시아와 라우라, 초이, 그리고 라우라의 친구들이라고 했다. 몇 사람 참석하지 않는 소박한 파티가 될 것이다, 라는 다다의 예상은 빗나갔다.
가르시아와 라우라가 같이 오는줄 알았는데, 가르시아 혼자만 왔다. 라우라는 다른데 일이 있어서 마치고 곧바로 카페로 온다는 것이다. 다다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안내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르시아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중년의 수업 덥수룩한 사장과 베소를 하고 종업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다.
"이 집은 우리 집이나 마찬가지에요. 편하게 내 집처럼 노셔도 됩니다."
가르시아의 얼굴은 정말 자기 집에 들어갈 때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카페는 넓었지만 안쪽에 룸이 있었고,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에는 하얀 테이블보 위에 그릇과 포크와 나이프 등이 가즈런히 셋팅되어 있었다.
파티가 끝난 것은 새벽 2시였다. 6시간동안 그들은 포도밭 하나를 송두리째 옮겨다 놓아야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와인을 마셨다. 10여명 들어갈 수 있는 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올 때마다 '다다'를 외치면서 다가와 다다의 양빰에 베소를 했다. 나중에는 뺨이 얼얼할 정도였다.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춤은 아르헨티나 전통 민속춤인 차카레라부터 아르헨티나 삼바, 살사 등 다양했지만 그 중심에 탱고가 있었다. 가르시아도 자신의 살사 파트너를 초대해서 함께 멋진 살사 춤을 보여주었다.
다다가 겨우 2주 더 보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물게TEk고 결정한 것이 그렇게까지 축하할 일은 아닐 것인데, 다다가 의아할 정도로 그들은 즐거워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되었다. 라우라와 가르시아의 친구들은, 자기 친구의 친구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 온 청년이, 탱고를 배우겠다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더 머물겠다고 결정한 것이 그들을 기쁘게도 했겠지만, 그날 파티의 흥겨운 분위기는 파티 주최자인 라우라 때문이라는 것을, 파티가 끝난 후 다다는 알 수 있었다.
"누나 때문이에요. 누나가 파티 호스트가 되어 사람들에게 연락한 것이 처음이거든요."
가르시아의 말을 듣고서도 다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가르시아가 덧붙였다.
"친구들은, 라우라가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분위기 못 느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