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0년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거세게 반발하자 원종은 무마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무마책은 통하지 않았고 원종은 마침내 장군 김지저에게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합니다. 이에 따라 김지저는 삼별초군 파악을 위해 명부를 압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삼별초 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맙니다. 삼별초를 지휘하던 배중손과 노영희는 마침내 원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 뒤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삼별초는 구정(연병장)에 모여 반란을 선포한 뒤 국가의 재물은 물론 일반인들의 재산까지 모두 갖고 배에 실은 뒤 개경으로 간 관리들의 가족과 백성들을 데리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삼별초의 봉기는 고려정부에 있어서는 반역행위였습니다. 삼별초는 1941년전까지 역사 서술에서 작란, 역적, 적당 등으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1년 김상기가 "임연·배중손 등의 배몽사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삼별초는 고려인의 전통적 민족의식에 따른 대외항전 사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관점으로 삼별초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면서도 그 내용에 항몽사상이 뿌리깊이 박혀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삼별초가 강화천도 때부터 몽고와의 전투에 최전선에 서 있었으며, 개경환도 이후에도 과감히 친몽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삼별초는 한마디로 고려인들의 강인한 자주정신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언급하겠지만 삼별초는 뛰어난 예술혼을 일본인들에게 전파한 주체이기도 합니다.
삼별초는 강인한 육체적, 정신적 힘으로 근 40년 간 전시수도였던 강화를 지켰으며 이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장기항전이었던 것입니다.
/선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