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29 삼별초, 최후의 항전을 결의하다


삼별초군이 떠난 장소로 추정되는 외포리 선착장(정포항). '고려사'는 삼별초가 강화도 서북해안을 통해 남하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 정확한 포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단 구포로부터 항파강에 이르기까지 배가 1천여 척이나 됐다고 적고 있다. 800년이 지난 현재는 고려의 군함 대신 천년사찰 '보문사'가 있는 삼산면으로 이어지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다.
 

   
 


"오랑캐 무리가 고려의 백성들을 살육하려 한다. 무릇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모두 연병장으로 모여라!"
배중손 장군의 목소리가 짐승의 포효처럼 '강도'(고려가 강화에 도읍을 세웠던 1232~1270년 강화도의 이름)에 울려퍼졌다. '삼별초' 수장인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선가 군사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수천 명의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삼별초군들이 일제히 배중손을 바라보았다. 배중손 옆으로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왕족인 승화후 온이었고 다른 한 명은 노영희 장군이었다. 배중손이 승화후 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영희가 함께 머리를 숙였다. 새로운 왕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맹세였다. 절을 한 뒤 벌떡 일어선 배중손이 일어서더니 사자후를 내뿜었다.
"이제부터 고려의 임금은 '승화후 온'이시다. 우리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잠시 이 곳을 떠나 서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 모두 진도로 모여라!"


   
 
"와~" 군사들의 함성이 거대한 먹구름처럼 강화의 하늘을 뒤덮었다. 창과 칼, 화살을 든 군사들은 배중손의 지휘에 따라 하나둘 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고려함선은 몇 개의 포구에 나눠져 배치됐으므로, 군사들은 무리를 나누어 배가 정박한 다른 포구로 가야 했다. 그렇게 1270년 음력 6월3일. 모두 1천여 척의 배가 강화도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전남 진도였다.
2010년 10월,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 공식행정명칭은 '정포항'이다. 800년 전, 삼별초가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떠났던 포구는 지금 관광객을 실은 도선들이 떠 있다. 바다는 짙은 카키빛이다. 찰랑거리는 바다 위에선 '삼보6호'를 비롯, 몇 척의 도선들이 외포리와 삼산면을 잇는 다리가 돼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중이다. 배 안에선 자연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웃음이 가을하늘처럼 푸르게 피어오른다.
몽고와 화친한 고려왕조를 향한 분노가 활활 타올랐던 결사항전의 포구는 횟집촌과 수산시장으로 바뀌었다. 근심만큼이나 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도 눈에 띈다.


"꽃게 드시고 가세요, 새우가 펄펄 뜁니다!" 횟집 상인들은 코스모스 같은 웃음으로 이방인을 유혹한다.
포구 한 켠, 큰 돌로 만든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하르방과 진돗개 동상도 보인다. 넓적한 바위엔 '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강화-진도-제주도'로 이어진 삼별초군의 행로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상징물들이다. 상징물 속으로 들어간다.

   
 

삼별초는 강화를 떠나 처음 진도로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후퇴한다. 그리고 1273년 3년 간의 반란을 마치고 전멸한다. 삼별초는 왜 당시 고려왕이었던 원종의 해산명령을 거스르고 봉기한 것일까.
천도를 단행한 고종이 1259년 승하한 뒤, 왕위를 물려받은 원종은 개경환도를 추진한다. 이는 1232년 강화천도 뒤 수십 년간 쌓인 고려인들의 피로도가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우기 원종은 세자시절 원나라에 가 있었으며, 왕이 된 뒤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와 사돈을 맺은 '친몽파'였다. 이때문에 1260년 왕이 되자마자 개경환도를 추진했으나 최씨 무신정권을 이어받은 임연, 임유무 부자의 반대로 10년 간 어려움을 겪는다. 1270년 임유무를 제거하며 무신정권 제거에 성공한 원종은 무신정권 기반이던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한다. 삼별초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감지한다. 개경환도가 이뤄지고 몽고와 화친할 경우 몽고항전의 중심에 섰던 자신들이 안전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선 것이다. 하물며 무신정권 수장인 임연 부자마저 제거되지 않았던가. 삼별초는 왕족의 한 명인 승화후 온을 새임금으로 옹립한 뒤 반몽정권을 수립하고 다시금 결사항전을 다짐한다. 이후 3년 간의 처절한 투쟁에 돌입한다.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에 가서도 자신들만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주장하며 세를 확대해 나간다.
삼별초 성격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한 것은 고려정부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원에 지속적으로 대몽항쟁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며 "삼별초의 항쟁은 자주적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민중항쟁의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삼별초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의 3개 특수부대를 말한다. 강화천도 직전인 1230년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는 '야별초'를 설치한다. 공병이면서도 자신이 사병처럼 부릴 수 있는 형태의 부대였다. 국가의 공적 군사조직이면서 무인정권을 수호하는 최정예부대 야별초는 강화천도 뒤 그 역할이 훨씬 커진다. 1253년 아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 운영된다. 여기에 몽고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의군'이라는 부대가 만들어진다. 이 세 부대를 통틀어 삼별초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정포항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다. 포구는 수십, 수백 척의 배가 한꺼번에 뜰 수 있을 만큼 커보인다. 카키빛 바다 위로 삼별초군이 탄 1천여 척의 군함들의 깃발이 펄럭이며 남쪽을 향해 멀어져 간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