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27 강화의 고려청자


 

   
▲ ▲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사진제공=리움미술관

최근 한 공중파방송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태안 마도 앞바다를 집중 조명했다. 바다 밑에는 수십여 점의 도자기가 푸른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800년 전 고려인들이 만들었던 고려청자였다. 청자는 그동안 술병이나 꽃병으로 주로 사용돼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청자는 꿀, 밴댕이, 가오리와 같은 음식물 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 화려한 외양의 고려청자는 '실용적'인 그릇이었던 것이다.
강화도에선 지금도 여기저기서 고려청자의 흔적을 목격할 수 있다. 중성터가 발견된 강화읍 옥림리와 선원면 창리를 비롯해 강화도 곳곳에선 청자파편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2008년과 2009년 강화군 선원면 창리와 강화읍 옥림리에서 발굴한 청자들은 대접, 접사, 잔 받침과 뚜껑 등으로 왕릉에서 출토된 청자류와 같은 최상급 청자들이었다. 이형구 교수는 "고려 중성은 1250년(고종 37)에 축성했으므로 이들 청자류는 이시기에 번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흥왕사터, 고려궁지, 혈구사터 등 고려왕조의 흔적이 생생한 강화도 곳곳에서도 어김없이 청자조작이 발견된다. 도로를 내거나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다보면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발견되는 것이다. "(땅을)파면 (고려시대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강화도에서 공공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청자가 강화도에 들어온 때는 언제부터일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고려왕조가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한 1232년(고종 19) 부터 고려청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부터 개경으로 환도하던 1270년까지 강화도에선 질이 높은 청자들이 무수하게 제작됐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국보 133호)다. 이 보물은 음양각과 주각 등 다양한 청자제작기술을 총동원한 대표적 보물이다. 1257년(고종 44) 축조한 최항의 묘에서 발견된 이 주자는 전성기 고려청자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 조각적으로나 장식적으로 매우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형구 교수는 "리움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는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는 1963년 강화에서 도굴된 최항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됐는데 이 청자 표면의 연꽃봉우리의를 장식한 진사설채(辰砂設彩)는 산화동을 안료로 하여 환원(還元) 번조(燔造)한 상태에서 선홍색의 발색을 유약밑에 성공시킨 것으로 이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한 진사설채 기법"이라며 "이 진사청자의 표면에 사용된 붉은 진사는 남용하지 않고 아주 필요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발색기법으로 최항의 몰년이 1257년이므로 이 진사청자는 이 보다 조금 이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화지역에서 발견되는 청자는 순청자에서부터 상감청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지역의 청자는 12세기에 만들어진 전성기 비색청자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편이다. 이때문에 청자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청자들은 화려했던 무신집권층의 생활을 잘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최항의 묘에서 나온 표형주자가 이를 잘 말해준다.
몽고와 대치하던 어지러운 시절에 이같은 예술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무신정권이 엄청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양질의 청자는 주로 전남 강진과 부안에서 만들어져 올라왔다.

   
▲ ▲ 선원사지에서 발굴한 청자 조각들. 선원사지는 최이가 세운 국찰로'팔만대장경'을 만들고 보존한 사찰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세력은 남해안과 서해안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안정된 생활과 막대한 권력을 영위할 수 있었다. 청자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은 궁궐과 관아, 귀족들의 저택 뿐만이 아니었다. 국가사업으로 세운 국찰들 역시 청자문화의 확산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청자들은 왕이나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죽었을 때 무덤에 함께 묻혔다. 이는 죽어서의 세계, 즉 '내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희종 석릉과 강종비 원덕태후 곤릉, 원종비 순경태후 가릉, 최항묘에서 출토된 청자들은 하나같이 신분에 걸맞는 청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후 강화도에선 도굴이 진행돼 상당수 보물들이 일본과 같은 외지로 유출됐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역시 도굴돼 공매현장에 나온 것을 삼성가에서 사들인 것이다.
중성터 발굴현장에서 서서 지표면을 바라본다. 황토에 점점히 밝힌 도자조각들이 가을햇살을 받아 '쨍' 하고 푸른 빛을 발산한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 @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