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들 수십개가 한꺼번에 그를 향한다. 뜨거운 열기가 훅 몰아쳤다. 3월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기는 텁텁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시기이지만 습도가 높기 때문에 결코 상쾌하지 않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좋은 공기라는 뜻의 스페인어인데, 왜 도시 이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는, 뒤를 돌아보며 최PD와 촬영감독을 찾았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던 디카의 스위치를 눌렀다.
찰칵.
 

   
▲ 김충순, 종이 위에 수채, 210×297㎜ (www.minari56.com)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국제공항은, 지금 매각 논란에 휩싸인 인천공항에 비하면 어린아이처럼 작다. 시설도 형편없다. 여기저기 여행가방을 들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없다면 김포공항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최PD와 촬영감독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기내 가방만 들고 온 그에 비해 최PD와 촬영감독은 수하물 코너에서 촬영장비를 찾아야 한다. 통관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릴까, 하다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먼저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게이트의 문이 열리자 작은 피켓이나 종이에 찾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가슴 높이로 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해 쏠렸다. 세계 어느 나라 국제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지만, 인천공항 1층 출국 게이트를 나올 때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는 처음에는 더위 때문일까, 생각했다. 어느 나라나 공항 게이트를 나가면 그 나라 특유의 냄새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외국인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맡는 냄새는 매운 마늘맛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해서 다다가 맡은 첫 냄새는, 핏빛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땀 냄새였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육감적이지도 않았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한 섹시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온몸을 나른하게 무장해제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 그 공기 속에는 스며있었다. 매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힘.
인천공항을 나올 때와 느낌이 왜 다른지 그는 곧 원인을 발견했다. 눈동자였다. 인천공항 게이트를 나올 때는 석탄처럼 검은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었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공항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까맣지가 않았다. 흑갈색, 브라운, 체리빛, 블루 등 다양한 눈동자의 색깔이 인천공항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꼭 30시간 만이다. 인천에서 동경, 동경-뉴욕행 비행기로 갈아탄 뒤 뉴욕에서 5시간을 기다려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정말 지구 반대편이었다. 기내에서 화장실 갈 때마다 운동도 하고 스트레칭도 했었지만 몸이 찌뿌듯했다. 공항 대합실에서는 와이파이가 되기 때문에 아이폰으로 접속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도 보내고 '여기는 뉴욕 JFK공항. 벌써 4시간째 기다리고 있음. 곧 B/A로 가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탄다. 온몸이 쑤신다. 헐~' 이렇게 트위터에 짧은 기행문도 올렸지만 지루했다.
EBS-TV의 다큐멘타리 팀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세계 여러 곳을 유명인들과 함께 방문해서 소개하는 그 프로그램 작가였는데, 다다도 자주 보던 프로그램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그는, 일요일에도 언제나 똑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차가운 물을 연거푸 세 잔 마신 뒤 거실로 가서 TV 채널을 돌리며 휴식을 취한다. 리모컨의 버튼을 여기저기 누르다 보면 가끔 이국적인 풍광이 보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한 땀냄새가 배어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작가나 음악가, 혹은 화가나 영화평론가 사진작가 등이 리포터가 되어서 세계 곳곳을 소개하는 기행 다큐멘터리였다.
"어디로 가는데요?"
"케냐요. 아프리카."
그는 잠깐 생각했다. 지금 아프리카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말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스튜디오에는 일감이 밀려 있었지만 조수로 일하던 후배 하나가 결혼을 이유로 그만둔다고 통보한 것이 일주일전이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설날 직전에 다시 한 번 연락이 왔다. 처음 전화가 왔을 때 지금은 곤란하다고 하자 담당 작가는 언제쯤 시간이 날 것 같은가 물어서 설날이 지나면 조금 괜찮아질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다시 연락을 준 것이다.
"이번에는 어딘데요?"
"아르헨티나요. 땅이 넓어서 다 가지는 못할 것 같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북부 산악지대를 가볼까 해요."
아르헨티나. 그는 잠깐 생각했다. 마돈나가 부른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라는 노래가 먼저 생각이 났다. 그리고……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다룬 알란 파커 감독의 뮤지컬 영화 '에비타'도 생각이 났다. 마돈나가 에바 페론역을 맡았을 때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싫어했다는 해외기사도 기억이 났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는 성녀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에바 페론,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사후에도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에바 페론을, 온갖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섹스 스캔들로 수십년동안 연예계 생활을 해온 마돈나가 맡는다는 반감 때문이다. '감히 창녀가 성녀를?' 이런 분노가 아르헨티나에 팽배하다는 기사였다. 다다는 마돈나 생각을 하다가 영화 '에비타' 속에 자주 나오던 군중 시위 장면들이 떠올랐다.
"위험하지는 않죠?"
"그럼요. 그래도 한때는 세계5대 부국 중 하나였는데요. 저희가 안전하게 모실게요."

갑자기 예정에 없던 여행으로 스케쥴을 심하게 조정해야 했다. 다다가 주로 하는 일은 영화 포스터와 CD 자켓 촬영 등 연예계 관련 커머셜한 부분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성 있는 순수 사진으로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학교 졸업하기 전에 깨달았다.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롤랑 바르뜨의 '카메라 루시다' 같은 책을 읽고 예술작가로서의 원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제대한 후 아니면 졸업 직전 대부분 진로를 변경한다. 그리고 선배들이 운영하는 스튜디오나 광고 잡지 어느 분야에 빈자리가 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닌다.
다다는 그래도 빠른 시간 안에 인정을 받았다. 패션 잡지 화보 촬영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찍은 몇몇 사진들이 관심을 끌었고 한 번 주목을 받자 그 다음부터는 너무나 일이 쉽게 풀렸다. 들어갈 때는 바늘구멍이었는데 그 문을 통과하자 고속도로까지는 아니었지만 강변북로 정도는 될 정도로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돈이 들어오고 이름이 알려졌다. 잡지사에서 연락이 오고 방송국에서 찾았다. 그동안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왔고, 대학 때 짝사랑하다가 거절당했던 여자가 갑자기 안부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 안 왔어요?"
뒤를 돌아다보자 최PD가 양쪽 손에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끌고 목에는 카메라 가방을 걸고 서 있었다. 촬영감독은 트라이포드가 들어있는 긴 가방과 밧데리 가방을 들고 그 뒤에 오고 있었다.
다다는 최PD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최PD는 오른쪽 상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렇다, 가이드가 아직 안 나온 것이다. 상가에서 잔돈을 교환한 최PD는 공중전화 부스에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왔다. 160센티미터도 안되는 그녀의 키가 더욱 작아보였다. 30시간동안 비행기 안에 있었던 것이다.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샤워도 못했다. 틈틈이 양치는 했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의 젊은 여자 얼굴은 아니었다.
"이거 드세요."
최PD는 불쑥 껌을 내밀었다. 잔돈을 교환하기 위해서 샀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우리의 도착시간을 1시간 반이나 잘못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일찍 나온다고 했는데, 이제 거의 공항 가까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가르시아는 올해 28살이라고 했지만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벗겨진 이마 때문일 것이다. 꽃미남은 아니지만 호감가는 외모다. 가이드가 허겁지겁 다가오자 최PD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늦은 실수에 너무 오버해서 대응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불쾌감 같은 것을 거칠게 표현했다.
앞으로 3주 동안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머나먼 이국땅에서 촬영을 책임져야 하는 최PD로서는, 첫 만남인데 약속보다 늦어진 것이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종의 주도권 싸움 같은 것이 아닐까, 다다는 생각했다. 가이드의 실수를 빌미로 기선을 제압하고 촬영을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최PD의 의도를 그는 읽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 PD로서는, 무엇인가 헤게모니를 쥘 필요가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가르시아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다 무려 1시간 3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 그 이유가, 페루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이었다. 수도인 산티아고 주변에서 일어난 진도 8의 지진으로 공항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뉴욕을 출발해서 산티아고를 경유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곧바로 부에노스로 들어온 것이다. 기내 안내방송을 했겠지만 다다도, 최PD, 촬영감독 모두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방송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가르시아는 최PD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비행기가 일찍 도착한 이유를 확인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그의 차량으로 향하면서 다다는 아르헨티나의 진짜 공기를 맡을 수가 있었다. 공항은 비행기의 소음, 열기로 훨씬 더 무더웠다. 공항을 벗어나자 따가운 아르헨티나의 햇볕이 다다의 살갗을 뜨겁게 태우기 시작했다.
"여기 음악 틀어드릴까요?"
뒷자리에 앉은 다다가 창 밖에 이어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풍광을 바라보는 동안 운전을 하던 가르시아가 카오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높낮이가 뚜렷한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탱고다. 다다는 조그맣게 소리쳤다.
"이제 시작이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