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강도시기에 고종의 아들인 원종만큼 힘든 왕자도 없을 것입니다. 원종은 왕이 되기 전인 강도 천도 3년(고종 22년·1235) 16세에 태자가 되어 부왕을 보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제왕학을 익히기에 앞서 부왕을 대신해 몽고의 침략자들과 협상하면서 강도 정부를 지키기에 더 바빴습니다. 1260년 원종으로 즉위한 해에 몽고의 쿠빌라이는 곧 화호(和好)의 내용을 담은 조서를 고려에 보냅니다. 원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영안공 희(僖)를 보내 쿠빌라이가 재위에 오른 것을 축하합니다. 이보다 한 해 전에 고종은 태자 전(원종)이 입조하는 편에 6개 조항의 요구사항을 쿠빌라이에게 올렸는데 이를 모두 윤허하는 조서를 영안군이 돌아오는 편에 보내옵니다.

조서의 첫 조항은 바로 "의관은 본국의 풍속에 좇아서 모두 고치지 아니해도 좋다(衣冠 從本國之俗 皆不改易)"는 고려의 요구를 허가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결정이였습니다. 의관 즉, 고려의 국왕을 비롯하여 신료 백성들의 복식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 것은 세계를 지배한 몽고 대제국에 합병되지 않고 고려가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둘째 조항은 "사신은 오직 (고려)조정에서만 보낼 것이요, 그 밖에는 모두 금절할 것이다"는 요구를 허가한 것은 고려의 국통을 유지하는 것이였습니다. 또 "개경으로 천거하는 일이 늦고 빠름은 (고려의)역량을 헤아려 할 것이다"는 환도시기를 형편에 따라 임의로 결정한다는 천도문제도 얻어냈습니다. 이 같은 외교적인 성공은 지난 30년 동안의 강도항전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1270년(원종 11년) 5월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이 해 세자 심(諶)을 몽고 황제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도록 요청해 허락을 받아 낸 후 고려의 세자 심은 몽고의 공주(즉,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몽고의 부마국이 됩니다. 이는 원종이 자청한 '여몽혼인동맹(麗蒙婚姻同盟)'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여·몽 양국 관계는 '동맹'관계가 되었고 오랜 전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원종의 즉위 이후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강화가 성립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6개 조항 중에서 3개 조항이 고려의 민족고유성, 독자성, 자주성을 몽고로부터 받아 낸 것으로 이는 고려의 외교적 승리라 할 것입니다. 이는 어려서 몽고의 침입을 받은 원종이 1231년~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40년 동안 긴 항몽시기를 왕자로 태자로 국왕으로 체험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몽고는 고려보다 일찍 1368년에 한족인 명(明)에게 멸망하지만 고려는 1392년에 조선에 왕권이 넘어 갈 때까지 건재했음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문대학교 역사역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