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잘라낸 듯 우뚝솟은 선돌법흥사 적멸보궁 소나무 길 장관
   
 


2 셋째날 영월

사방을 둘러싼 청정한 녹색 빛을 만끽하며 마음까지 상쾌해진 새얼역사기행단은 지난 20일 아침,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틀 동안 태백과 정선을 오가며 강을 건너고 산길을 올라 동굴 속까지 통과했지만 120여 명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와 보니 눈부신 햇살은 주변의 풀과 나무의 푸르름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산촌의 아침은 아무리 여름이라도 쌀쌀한 법. 기행단의 일부는 얇은 긴팔 겉옷을 꺼내 입으며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 선돌


▲ 신선도 놀고 갔다는 신선암 선돌

숙소가 있던 정선에서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선돌이었다. 제천에서 영월로 진입하는 길목에 서 있는 70m 높이의 이 바위는 날골과 남애마을 사이의 서강 강변에 서 있어서 선돌이라고 불린다.

신선이 노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 신선암이라도 한다는 이 기암을 보기 위해 잘 정비해 놓은 숲길 계단을 올랐다. 가는 길 심심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처럼 수십 마리의 매미가 일제히 여름의 소리를 들려준다. 매미울음 소리에 박자를 맞춰 걷다 보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곧 시야가 훤히 넓어지면서 옆 벼랑에서 칼로 잘라낸 듯 우뚝 서 있는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쪽은 울퉁불퉁한 바위이지만 강쪽 방향엔 어린소나무와 회양목 등 작은 관목들로 뒤덮여 있다. 뒤로 보이는 굽이쳐 흐르는 강과 어울려 가히 절경을 뽐내고 있었다.

38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엔 선돌 밑으로 1905년에 시멘트와 석벽을 쌓아 만든 도로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길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순조 임금 20년 때 학자였던 오희상과 홍직필이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읊고 선돌에 직접 새겨놓은 '운장벽'이란 글귀를 볼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 단종애사의 고장 영월

2010년 새얼역사기행이 선택한 마지막 여행지 영월은 흔히 단종애사의 고장이라고 한다. 단종의 능(陵)인 장릉이 있고, 세조에게 왕위를 뺏긴 뒤 유배생활을 했던 청령포가 있는 곳이다.

기행단은 먼저 선돌에서 자동차로 5분이 채 안 걸리는 장릉을 찾았다. 단종은 12세 어린나이에 조선의 제 6대 왕으로 즉위했지만 삼촌인 세조에 의해 불과 3년 만에 왕위를 뺏기고 유배당한 비운의 왕이다. 장릉을 보기에 앞서 먼저 단종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즉위식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까지 단종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알리기 위해 연대기식으로 모형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3년이란 짧은 즉위기간에서 예상할 수 있듯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사실이 왠지 서글펐다.

역사관 뒤쪽 언덕(당시엔 산이었겠지만)으로 올라 드디어 잠들어 있는 어린 왕을 대면했다. 지금 단종이 쉬고 있는 자리에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버려진 뒤 세조는 시신을 거두지 말라는 어명을 내린다. 하지만 당시 영월 관아의 우두머리였던 엄흥도가 이를 어기고 몰래 시신을 수습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눈 덮인 산을 걷던 중 엄흥도는 노루가 쉬다가 도망가 눈이 쌓이지 않은 지금의 무덤 자리에 시신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잠시 뒤 다시 길을 떠나려하자 단종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고, 엄흥도는 이곳이 하늘이 내린 묘 자리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단종을 잠들게 했다.

잠시 고개를 숙여 그의 넋을 기리고 이번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청령포로 향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쪽은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섬과 같이 완벽하게 고립된 이곳에 도착한 때엔 해가 하늘 정가운데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일행은 연신 부채질을 하며 이마와 턱의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곧 배를 타기 위해 나루터에 다다르자 강 건너로 보이는 청령포의 모습에 숙연해졌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는지, 혼자 갇혀 지내며 얼마나 무서웠을지,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이윽고 웅~하는 모터소리와 함께 배가 선착장에 도착해 기행단은 배를 탔다. 그리곤 조용히 강을 건너며 550여 년 전 17세의 나이에 이 강을 건넜을 어린 단종의 심정을 짐작해 본다.
청령포에 내려 수십 그루가 모여 있는 소나무 군락을 통과하면서도 그의 외로움을 추측해 본다. 그가 생활했다던 조그마한 기와집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해지는 노산대, 홀로 남겨진 정순왕후(단종의 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그의 한과 그리움을 다 보고 들었다는 관음(觀音)송까지, 청령포의 모든 것엔 단종의 애환이 서려있었다.
 

   
▲ 법흥사


▲ 1천년 넘게 역사를 이어온 법흥사

첫 날 정암사에 이어 또 한 곳의 적멸보궁 법흥사를 찾았다. 법흥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성지로 643년 신라의 자장율사가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하지만 정작 사찰은 그리 평탄치 못한 세월을 보냈다. 891년 진성여왕 5년 때 불에 탄 뒤 재건됐으나 다시 큰 화재를 만나 1천년가까이 명맥만 유지됐다. 이후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이름이 바꼈다. 그러다 10년 뒤 또 한 번 화마에 휩싸여 1930년 중건됐지만 다음 해 산사태로 옛 절터의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의 풍파를 고스란히 나타내 듯, 일주문 왼쪽 끝에 자리한 극락전엔 현판도 없이 빛바랜 단청과 기와만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참배객들을 맞았다.

 

   
 

지붕 위에 삐죽삐죽 돋아난 이름 모를 풀까지 꼼꼼히 살펴본 뒤 적멸보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법흥사의 적멸보궁으로 가는 소나무 길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다. 양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는 금강송들은 가슴마저 시원하게 했다.

적멸보궁 뒤 쪽에는 자장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인 토굴이 봉긋한 무덤의 형태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뚝 서 있는 사자산의 연화봉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일행 중 일부는 직접 신발을 벗고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절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모진 고비를 넘기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법흥사가 마치 한국의 반만년 역사처럼, 우리네 사는 인간사처럼 느껴져 한 번 더 경내를 돌아보았다.

/영월=글·사진 심영주기자 yjshim@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