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규보, 문장으로 세계를 움직이다


'산 속의 스님이 밝은 달을 갖고 싶어/ 항아리 가득 물과 함께 담았지/ 절에 도착하면 그제야 알게 되겠지/ 항아리 기울여 물 쏟으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 이규보는 500년 고려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문장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55세에 강화에 들어와 74세 눈을 감을 때까지 강화에 머물며 많은 명문을 남겼다.


이규보(1168~1241)의 '우물 속의 달'은 그의 문장력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는 인생을 달밤과 항아리, 물이라는 서정에 실어 피워낸 이 시는 차라리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고려 고종때 강도시대(고려가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한 1232~1270)를 살았던 이규보는 500년에 이르는 고려왕조를 통틀어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55세에 강화에 들어와서 74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강화에서 일생일대의 역작을 써내려 갔다.
 

   
▲ 2005년'8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어 문화부 포스터에 등장한 이규보의 초상.

'동국이상국집' 역시 강화에서 완성됐다. 그 중에서도 '동명왕편'은 해모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동명왕 탄생 이전의 일을 노래한 서사시다. 출생에서부터 시련, 투쟁, 승리 등 동명왕의 영웅적 일생을 다뤘다. 고구려 건국역사를 서사시로 빚어낸 것은 무엇보다 고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통해 몽고의 침략으로 훼손된 고려의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자 의도했다.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하며 역사적 우월성을 문학으로 드러낸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와 일연의 삼국유사(1281) 중간선상에 놓여 있기도 하다.
대문장가 이규보가 대몽항쟁시기 외교문서를 전담해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제일의 인쇄문화재인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대의명분을 천명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원하옵건데 제불성현 삼십삼천은 부디 간곡하게 비는 우리들의 정성을 살펴주시어 신통한 힘을 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저 억세고 모진 오랑캐들을 멀리 쫒아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이규보의 묘는 진강산 동쪽 상직골에 자리했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번지. 무덤에 닿기 위해 논길로 진입해야 했다. 농로 끝에서 만난 이규보의 묘는 강화에 있는 웬만한 왕릉보다 규모가 커 보인다. 여주 이씨 후손들이 잘 정돈해 놓았기 때문이다.
묘를 올려다보는데 왼쪽으로 아담한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초상을 모신 유영각이다. 비탈진 묘지를 올라가 묘 앞에 이른다. 이규보 묘는 용미를 길게 가진 원형봉분의 형상이다. 호석을 두른 봉분 앞에는 혼유석(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과 계체석(무덤 앞 평평하게 만든 장대석)이 보인다. 강화의 고려무덤에서 발견되는 석수와 석인은 물론이고, 그의 묘 앞에 조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 석양의 모습도 눈에 띈다. 무덤 양 옆 문안석은 고려 왕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고려무덤의 석조조각이다.
'백운거사'란 호를 갖고 있는 이규보는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다. 한 번만 읽으면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이규보는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벼슬다운 벼슬에 오른 것은 쉰 살이 다 돼서였다. 이규보는 특히 '과거시험감독관'에 해당하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란 벼슬을 여러 차례 지냈다. 하지만 벼슬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낮추며 사양하는 마음을 표했다.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표절논란과 같이 결점이 있으면서도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어떻게든 자리에 오르려는 지금의 일부 장관 후보자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 이규보 초상이 모셔진 유영각.

그에 대해선 무신정권에 협조해 벼슬을 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려의 강화천도 뒤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백치의 금성이 하나의 띠처럼 하(염하)로 둘러싸였으니/ 공력(최우의 공)을 비교하건대 누가 더 많을까…중략…이미 하가 금성의 견고함보다 나음을 알겠으며/ 또한 다시 덕(최우의 덕)이 하보다 나음을 알겠도다'
하지만 칼보다 강한 붓으로 대몽항쟁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려왕조의 강화천도 뒤 몽고군이 승천부에서 강화를 바라보며 시위를 하지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오랑캐 종자가 비록 완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능히 날아서 물을 건널 수 있으랴/ 저들도 역시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쳐 시위할 뿐이네/ 누가 능히 물에 들어가라 타이르리오. 물에 들어가면 곧 모두 죽을 것이기에'
이 시는 몽고를 조롱하는 글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시를 본 몽고군들이 감동을 받아 철병하기도 했다. 긍정부정의 평가를 넘어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탁월한 문장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해 '삼혹호' 선생이라고도 불린 이규보. 그의 무덤 앞에 있노라니 새소리는 시가 되고, 바람은 거문고가 되어 얼굴을 스치운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