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주년 광복절 특집 다시 본 8·15 전후의 인천


▶8월12일자 1면서 계속

8월 14일 인천. 내일 정오에 일본 왕의 특별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큰 관심을 끈 것도 아니었고, 15일 12시 일부 시민들이 일왕의 담화를 들었지만, 라디오 소리가 불명확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귀국하기 위해 부두에 모인 일본인 부녀자와 아이들. 이들은 현금 1천원, 소형 짐을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오후 2시경 공습경보와 대공포 소리가 요란하게 인천 시가지 하늘에 울려 퍼지면서 '항복 이야기'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 일제는 학생들까지 전쟁에 내몰았다. 인상(현 인천고) 학생들이 '축 징병제 실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에 나서고 있다.


"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여오기에 집을 뛰쳐나가 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이 넘었는데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알고 난 후에 급조한 것인지는 몰라도 일왕 담화 몇 시간 후에 그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죽은 듯이 일제 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여졌던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을 나는 그 순간 알아차리게 되었다."('황해문화' 1994년 겨울호 '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추억' 임병방 인하대 교수)

 

   
▲ 조선은행 발행통장. 통장주인은 귀국에 대비해 1945년 8월16일 전액을 모두 찾았다.

15일 이후 인천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일본인들은 전전긍긍하였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스스로 지난 35년간 저질러 온 죄상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귀국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먼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현금을 서둘러 본국으로 송금하는 절차를 밟았다. 몰수당할지도 모를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일 오후에는 일경의 삼엄한 경비 아래 '인천신사'에서 소위 '신체(神體ㆍ신령의 상징으로 신사에서 모시는 예배의 대상물) 이전식'을 거행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일본인 부윤과 한국인 모 씨 등 참석자들은 비분강개해 모두 울음을 터뜨리며 '언젠가는 다시 신체를 모실 때가 올 것'이라며 자동차 편으로 신체를 모처에 숨겼다고 한다.

그를 보면, 적어도 인천 거주 일본인 지도층이나 친일 인사들은 '광복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단지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순응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에 인천 시민들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마음껏 외치며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일경은 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세가 이미 기울어진데다가 여차하면 유혈을 부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만세는 17일,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은 없었다.

그 무렵, 북쪽에는 소련군이, 인천에는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2, 3일 안으로 미군이 상륙한다고 믿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가재도구를 헐값에 내다 팔았고, 한국인 부하 직원에게 사업체를 거짓으로 맡기는 편법을 써서 훗날을 도모하고자 애를 썼다. 각급 관공서에서는 각종 문서를 태우느라 그 연기가 몇날 며칠을 두고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식민 통치의 죄악상을 은폐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인들은 재산을 건져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 같은 노력은 대개 허사로 돌아갔다. 후에 미 군정청이 어른은 50kg 짜리 2개, 12세 이하는 1개로 소지 화물 수를 제한했고, 짐을 일일이 조사해 부의 유출을 막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아직 상륙하지 않았다.

9월 8일 정오 무렵,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미군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팔미도 쪽에서 미군 비행기 편대가 날아와 시위하듯 굉음을 내며 인천 상공을 선회했다. 이날 인천시 전역에는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시민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환영하러 부둣가로 나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장을 갖추고 엄존하는 상황에 건준보안대는 불충분한 장비로 자치적으로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나섰으니 주객관계가 분명하지 못하여 마찰의 소지가 많았다. 결국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 미군이 인천 진주를 환영 나온 인천 시민들의 행렬. 태극기와 플래카드 뒤로 수많은 시민들이 뒤따르고 있다.


"미군이 인천축항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해방군에게 환영의 뜻을 표하고자 한 것이다. 군중들이 현 우체국 앞을 떠나 구 산업은행 앞에 이르렀을 때 경비 중이던 일본 경찰들이 이 행진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군중들 마음속에는 패전자들이 무슨 왈가왈부냐는 생각으로 불응하였으며 이 행렬에 앞장섰던 권평근(權平根)과 이석우(李錫雨) 들이 일경과 옥신각신하다가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때 일경이 발포하여 앞에 섰던 권평근과 수명이 쓰러져 해방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김영일 저, '격동기의 인천')
이 사건은 미 군정청에 의해 수습되고, 장례는 10일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장례 행렬에는 민족의 불행한 앞날을 예고나 하듯 태극기, 미군기, 소련기, 붉은기가 저마다 물결을 이루었고, 사람들은 각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어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서 가진 영결식에서 한 좌익인사는 "일본놈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이자!"고 말해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위기을 느낀 일본인들은 미군의 눈치를 보면서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려 했지만, 정작 그들이 인천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그해 10월 하순경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엉뚱하게도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서 출발하기로 하고 '잘 있거라, 인천아'란 노래를 작사, 작곡해 단체로 노래 연습을 했다.
 

   
▲ 1945년 9월 이후 인천시 행정을 맡았던 미 군정관 스틸맨 일행이 시청 앞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잘 있거라, 인천아. 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 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울리겠지, 월미도야!//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 뜨거운 인사 받아줘요. 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약속이나 한 듯이 열차마다 모두 '잘 있거라, 인천아' 노래가 드높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떤 차량에서는 주안역을 떠나 마침내 인천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래가 계속되었다.

인천의 모든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고별인사를 인천에서 발행하는 '대중일보' 지상에 게재하였다. '우리는 떠나기 어려운 인천을 떠나면서 바라건대 다년간의 후의에 감사하며 고별의 인사를 드린다. 우리는 조선이 신속하게 건전한 독립을 완성하기를 기원한다."('황해문화' 2001년 여름호 인천철수지)며 일본인 대표는 뻔뻔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에 대해 '인천철수지'(원제 仁川引揚誌)의 해제를 집필한 노영택 대구효성가톨릭대 교수는 "'떠나기 어려운'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미군에 대해서는 아첨이라고 할 만큼 극찬하면서 식민지 강점자였던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나 사과의 말은 책 전체를 통해 한 마디도 없고, 한국인에 대한 인간적 애정이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에 인색한 것을 보면서 분노와 쓸쓸함을 함께 느끼게 됨은 어쩔 수가 없다"고 피력하고 있다.
 

   
▲ 일제 강점의 원죄는 남북 간의 전쟁을 배태하게 했다는 데 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중구 답동성당 일대의 폐허모습.


그렇게 그들은 떠났다. 악몽 같던 식민통치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36년간의 압제보다도 더 분한 일은 일제에 의해 배태된 전쟁을 남북이 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들의 원죄적 죄 값인데도 일부 관료와 지식인들이 아직도 '망언'을 일삼고,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라는 것도 '통석의 염(痛惜의 念)'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광복 65주년을 맞은 오늘, 한일 역사의 갈피에는 미완의 숙제가 켜켜이 산적해 있다.<끝>

/조우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