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주년 광복절 특집/ 다시 본 8.15 전후의 인천


광복은 언제 오는가? 오기나 할 것인가?
1940년대 초는 절망의 시기였다. 시인 이육사에게조차 광복은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처럼 멀었다. 그러나 천고가 내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 역사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그들의 행태를 지켜본 이들은 그 연옥 같은 시대가 서서히 조종을 울리고 있음을 체감해 가고 있었다. 일제는 단말마적인 광기로 치달았다. 1943년, 국민총력 인천부연맹은 인천부 내 각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를 반드시 일본어로 부를 것을 통첩하였고, 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하는 등 광분하였다.

   
▲ 일제는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국민 징용령'을 공포해 수많은 이들에게 노역을 강제했다.

그 이듬해인 5월, 이미 도시소개령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재1회 학도동원을 실시해 인천상업, 인천중학, 인천고녀(仁川高女) 남녀 생도 3백60여 명을 인천육군조병창에 들어가 일을 하도록 독려했고, 일반 부녀자에게는 '몸빼'를, 남성에게는 '국민복'을 강제로 착용시켰으며 여자정신대 근로령 공포, 군복 수선 및 세탁을 위한 여학생 동원과 각 가정에서의 놋그릇, 놋대야 공출 등을 강제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희화적인 상징 장면은 도산정(桃山町ㆍ지금의 중구 도원동) 소재 인천공설운동장의 야구장을 느닷없이 폐쇄한 것이다. 본국에서는 매년 갑자원대회를 열고, 전조선야구대회도 열심히 열어왔던 일제가 하루아침에 야구를 '영미귀축(英美鬼畜)의 스포츠'라며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식량증산을 한다며 인천박문고녀 학생들을 동원해 '도산정 야구장'을 갈아 뒤엎고, 거기에 콩밭을 만들었던 것이다.(야구계 원로 김재은 선생 증언)

   
▲ 인천시 동구 만석동 부두에 일본제국주의의 소형 잠수함이 방치돼 있다. 인천은 일제의 중국 침략 교두보였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천 조병창에서 총, 대포, 화염방사기, 잠수함 등을 제작했다. 사진 속 잠수함은 인천 조병창이 당시 인천부 만석정(현재 만석동)에 소재한 인천 기계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이는 전국의 쇠붙이를 공출해 일급 기술자들이 만든 것이다. 일제는 이를 광복 때까지 사용도 못하다 황급히 버리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 소형 잠수함은 1950년대 말까지 같은 장소에 방치돼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사진 속 일장기가 희미해졌으며 멀리 만석동 갯벌도 보인다. 미군이 8·15 후 찍어놓은 사진을 조우성 씨가 인터넷 이베이 옥션에서 발견, 구입해 본지에 공개했다.

광복의 그날, 인천시민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언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그해 8월에 접어들면서 B29의 인천 공습이 사라진 것과 만주 등지에 피난 온 듯한 일본인과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 일본 패망의 전주곡이 될 줄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 우 성 /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내일자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