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 교수의 강화이야기
   
 


1963년 초에 아주 큰 사건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바로 고려 청자의 최상품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가 무신정권의 제 3대 수장인 최항의 묘지석과 함께 강화도의 어떤 무덤에서 도굴꾼에 의해 출토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들 최항의 유물들은 곧바로 당시 최고의 갑부인 이병철 회장에게 넘어가 청자는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석은 청석제로 가로 146cm 세로 66cm 의 대단히 큰 장방형 지석으로 한 면에 당초문대를 음각하여 두르고 행선을 마련하여 44행에 각행 27자씩을 해서체로 음각하였는데, 무른 곳은 삭아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지요.
묘지의 석문은 황수영교수가 '고고미술' 제106·107합집에 소개하였습니다. 최항의 지석에 의하면 최항은 (고종 44, 1257년)윤 4월 초이틀에 견지산 동쪽의 별제에서 작고하여 8월 26일에 진강현 서쪽 창지산 기슭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습니다. 견자산(見子山)은 지금의 강화산성 동쪽 견자산(개성의 견지산을 따 온 것임)입니다. 그리고 최항이 묻혔다고 하는 창지산(昌支山)은 진강산 서쪽의 어느 구릉의 북쪽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마 이 부근 어느 지점에서 최항의 묘가 도굴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항은 많은 정적을 제거하고 향연을 자주 여는 등 악정을 일삼았다고 하지만 정권수반으로 서북면병마사를 겸하면서 몽고와 전쟁에 대처하고 팔만대장경을 완성하면서 왕권 유지에 노력하고 강력하게 국가를 수호하려고 애쓴 면도 있습니다.
몽고가 강도정부에게 출륙할 것을 요구하자 최항은 1250년(고종 37)에 승천부에 신궐을 짓고 응하는척 했으나 국왕의 사신 접견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1252년(고종 39)에는 몽고의 사신 다가 등이 왕의 출륙친영을 요구해 오자 신안공 전을 보내어 대신 맞게 하는 등 아버지(최우)의 정책을 계승하여 몽고에 대해 강경책을 썼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몽고군이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하자 왕이 승천부의 신궐에 나가 몽고의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한때의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선문대학교 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