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21 호사스럽게 살다 간 최항


진녹색 잎들로 뒤덮인 '진강산'을 바라본다. '진짜 강하다'는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어감 때문인지, 한여름 물이 잔뜩 오른 나뭇잎들 탓인지 모르겠다. 진강산은 탄탄하고 강인한 빛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곳 어딘가에 최씨 무신정권의 3대째 권력자인 최항이 묻혔다.

   
▲ 최항 묘지석 탁본. 지석은 현재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출처=온양민속박물관 발간'조선시대 지석의 조사연구'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63년 어느 늦은 밤이었다. 스스슥. 몇 개의 그림자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부엉이소리와 풀벌레소리만 들릴 뿐 산은 고요했다. 마침내 그림자들이 멈춰선 곳은 커다란 무덤 앞. 그 중 한 명이 삽으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도굴범들의 삽질은 점점 격렬하고 빨라졌다. 2m쯤 파내려 갔을까. 마침내 삽날에 쨍하고 무엇인가 부딪혔다. 도굴범들이 삽을 집어던지고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아낸 도자기 하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청자의 푸르스름한 빛깔이 달빛을 받아 찬연히 빛났다. 연꽃잎 모양으로 만들어진 그 청자는 여느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해 보였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를 꺼내든 도굴범들의 이빨도 하얗게 번뜩였다. 묘지석이 함께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곳이 최항(?~1257)의 무덤인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었다.
청자진사주전자는 고려 무신정권 세번째 집권자인 최항을 상징한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최고의 기술로 빚어낸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청자진사주전자는 이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고 1970년 오사카시립박물관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당시로써는 거금인 3천500만 원에 이 청자진사주전자를 사들여 현재 리움미술관이 보관 중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주전자를 사용한 최항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 청자주전자는 고려시대 청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최항의 정체성은 바로 이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와 같다고 보면 된다.

   
 
   
 

최항은 이 고려 최고의 걸작인 청자주전자를 사용하며 고위 관리들과 왕실사람들을 초청해 무수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의 아버지 최우보다 짧은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두 배가 넘는 연회를 열 정도였다. 최항은 이와 함께 격구장까지 갖추고 격구를 했으며, 말 타고 재주를 부리는 '희마' 구경까지 그의 저택에서 이뤄졌다. 말에는 황금 등으로 장식을 하고 말의 머리에 금 잎사귀와 비단 꽃을 꽂았을만큼 사치스러운 파티였다.
최항은 최우와 기생이었던 서련방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다. 송광사에서 출가한 최항은 쌍봉사로 옮긴 뒤 떠돌이 중들을 모아 제자로 삼고 재산을 늘렸다. 그런 그가 무신정권으로 돌아온 것은 1248년(고종35)이다. 이때 아버지 최우는 그를 불러들인 뒤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란 벼슬을 내린다. 동시에 글을 배우고 예를 익힌다. 이후 추밀원지주사가 된 최항은 아버지로부터 가병 500명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이듬해 최우가 죽자 최항은 교정별감이 된다.

   
▲ 고려 무신정권의 수뇌였던 최항의 무덤에서 발견된'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의 자태. 이 청자는 높이 32.5cm, 몸지름 16.6cm, 밑지름 11.2cm, 입지름 2.7cm로 국보 제 133호다. 고려청자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기법으로 널리 알려졌다. 표주박모양의 주전자이나 몸체를 크고 작은 연꽃봉오리를 중첩시켜 만들었으며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잘록한 목 부분의 중앙에는 동자가 작은 연꽃을 끌어안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조각했고 손잡이에는 개구리모양의 작은 고리를 장식해 평화롭지만 생동감 넘치는 연지의 정경을 나타냈다. /사진제공=리움미술관

시기심이 많았던 최항은 민심을 얻고 있던 고위관리들을 귀양보내거나 죽인다. 집권초기엔 각 지방에서 받던 세를 면제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소환하기도 했으나 점점 호사와 향락에 빠져든다.
이같은 최항이 정권을 잡은 것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최씨 정권의 세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최항 정권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항은 한편 몽고에 대해서는 강한 입장을 보여준다. 몽고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자 최항은 1250년에 승천부(경기도 개풍)에 새 궁궐을 짓는다. 그러나 2년 뒤 왕이 그 곳에 가서 몽고사신을 만나려하자 이를 반대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과장은 "최항은 몽고에 항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전쟁의 와중에서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며 "특히 최항의 집권기에는 몽고의 재침입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으므로 집권자로서는 부적절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 @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