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장시(場市)는 서울 종로의 육의전이었다. 지방은 대부분 5일장이었다. 사회사적 의미로 보면 장시는 어느 지역에서나 중심가에 위치했었다는 시공적(時空的) 특성과 기능에 주목하게 된다.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는 강화 읍내장과 황어장 등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3·1 만세운동의 거사지였다. 장(場)의 사회사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919년 3월 18일 강화 만세에는 1만여 명이 참가했었다.

그 '장시'가 '시장(市場)'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개항 이후의 상품 경제 발달과 연관이 있지만 '사회, 경제, 문화 및 기타 대상물 매매시 가격을 결정하고 지불하는 곳(벨소우)'이라는 고전적 의미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인천의 첫 상설시장은 지역 특성이 반영된 어시장이었다. 1895년 인천 수산업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흥택이 어획물을 사들여 내리(內里·지금의 중구 내동)에서 팔아오다가 1902년에 상설 어시장을 개설했었다.
그 이후 생선류를 파는 제1시장, 청과류를 다루는 제2시장, 공설 청과물 시장(속칭 깡) 등이 문을 열었고, 광복 후에는 신포, 송월, 양키, 숭의, 자유, 중앙, 송림, 부평역전, 답동시장 등이 탄생해 서민의 삶의 터전이 됐다.

그렇듯 번성했던 시장이 대형마트 등에 위협받자 경쟁한다며 외장(外裝)을 어설피 일본식으로 바꾸더니, 이번엔 SSM인가 뭔가가 동네 구멍가게까지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도 시대에 걸맞은 변화를 꽤해야겠지만 대자본의 인정사정없는 재래시장과 구멍가게 싹쓸이만은 막아야겠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