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파리에서 언론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각기 다른 면모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기회였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사의 큰 획을 긋는 화가들을 만나보고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크·샤갈을 위시하여 한스·악퉁, 피에르·슈라지, 소니아·들로에, 한타이, 마네시에 같은 에꼴드파리(파리화파)에 속한 쟁쟁한 화가들의 화실을 둘러보고 그들의 예술관을 들으면서 창작현장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은 귀중한 체험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이성자(李聖子)와 이응로(李應魯) 화백이 프랑스 화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활약하고 있었고 일본계 화가들도 몇명 있었지만 중국계 화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산화된 본국 사정도 있었겠지만 파리를 중심으로 한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국인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출신 추상화가 자오·우키(1921~)는 점차 프랑스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드골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문화성 예술창작국장을 지내던 베르나르 안토니오르씨는 중국화가 자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선으로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안토니오르 국장은 자오·우키의 작품을 통해서 과거 중국의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파리에서 떠오르는 중국인 추상화가의 작품은 공산혁명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기존의 가치관이 급변하는 중국대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주부터 홍콩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 모여드는 인파와 그의 작품을 해설하는 오늘날 중국 미술평론가들의 글을 보면서 혼란기에 파리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던 자오·우키가 이제야 모국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