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저서를 내놓아 국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기업인 김우중씨가 60조원의 빚만 국민들에게 남긴 채 경영에서 퇴진하자 어느 일간지 만평은 「세상은 넓어도 할 일은 없다」며 그를 희화화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극복에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또다시 닥친 큰 재벌의 몰락이 국민경제에 미칠 충격을 걱정하느라 미처 웃을 힘도 없을 정도였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황제를 연상시킬만큼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재벌, 특히 국내 자산 2위를 차지하는 거대 재벌의 몰락은 전제군주시대에나 있을 법한 애꿎은 피해를 일반국민들에 전가시키게 됐다.

 재벌총수는 기업이 살아있을 때는 선진경영인으로 이름을 날리지만 기업이 무너지자 그가 여기저기서 빌린 돈의 뒷감당을 하느라 국민의 형편만 더욱 궁핍해지고 금융시장은 불안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대우사태의 윤곽이 국민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김대중 대통령은 그동안 준비해온 재벌개혁의 청사진을 8·15 경축사를 통해 발표, 예전과 같은 재벌의 폐해를 없애겠다고 밝혔다.

 이는 곧 정재계간담회와 입법과정을 통해 구체화됐는데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을 통한 순환출자 억제와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기업지배구조개선 ▲변칙 상속이나 증여 방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는 우선 재벌 총수가 얼마 안되는 자본금을 갖고 수 십개의 계열사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정거래법을 개정,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하기로 했다. 2001년 4월부터는 순자산의 25% 이상을 다른 회사에 출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또 어려운 계열사를 우량계열사가 도와주는 것을 막기 위해 부당내부거래 감시제도도 강화, 10대 그룹의 경우 일정규모 이상의 내부거래는 공시토록 하는 한편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과징금 부과한도도 현재의 2%에서 5%로 높이기로 했다.

 한편 총수 1인이 지배하는 기업의 경영구조를 일신하기 위해 민간인들로 하여금 기업지배구조개선위원회를 구성, 모든 기업이 따를만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마련했다.

 이 규준 가운데 핵심부문은 법제화돼 자산규모가 2조원을 넘는 92개 상장기업은 2001년부터 전체 이사의 50%를 사외이사로 채우도록 했으며 사외이사수도 최소한 3명 이상은 되도록 했다. 이 기업들은 또 내년부터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이사후보추천위원회와 함께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재벌들이 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2금융권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했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증권·보험사, 수탁고 2조원 이상의 투신사 등도 내년부터 사외이사 50% 비율을 적용받고 이사후보추천위원회와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투신·투신운용사의 경우 자기계열 투자한도가 신탁재산의 10% 이내에서 7% 이내로 줄어 계열사에 대한 주가관리나 지원 등을 하기 어렵게 했으며 사실상 지배주주인 2대 주주와 일정비율 이상 수익증권을 판매한 회사 등도 자기계열에 포함시켰다.

 또 예금보험공사로 하여금 금융기관 부실책임자에 대한 재산조사 및 손해배상책임추궁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재산조사 자료요청권, 손해배상청구권 등을 부여했다.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은 일반 상장기업의 50% 수준으로 완화돼 소수주주들의 권리행사가 좀 더 쉬워졌다.

 대표소송 제기권은 0.01%에서 0.005%로 ▲이사 위법행위 유지청구권, 이사·감사해임 청구권, 청산인 해임청구권은 0.5%에서 0.25%로 ▲회계장부열람청구권, 주주제안권은 1%에서 0.5%로 ▲임시주총소집청구권, 업무·재산상태검사인 선임청구권은 3%에서 1.5%로 낮아졌다.

 재벌들이 세금을 거의 안내고 부를 세습하는 것도 막는 방안을 마련했다.

 비상장주식 증여시 상장후 실제주식가액으로 수정해 증여세를 물리고 자녀에게 금전을 무상 또는 저리로 대부하는 경우도 추적 과세한다. 경영권을 수반한 최대주주의 주식이 상속·증여될 경우 20~30%의 할증률을 적용해 과세키로 했다.

 공익법인을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도 방지, 동일회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경우 매년 시가의 5%를 10년간 가산세로 물린다.

 그러나 당초 거의 모든 금융기관에 대해 사외이사제와 감사위원회를 도입하겠다고 하던 것에서 대형 중심으로 48개 금융기관만 도입하게 된 것이나 이사추천위원회가 사외이사만 추천하도록 한 것 등은 당초의 계획에서 상당부분 후퇴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대주주에 대한 과세강화 방안도 1년 미만 단기보유일 때만 적용하는 등 국회심의과정에서 당초 계획에 비해 많이 변질돼 과연 개혁의지가 있는 것이냐는 지적도 받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