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배준영 외교통상부 한미자유무역협정 자문위원(주)우련통운 전무
최근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The World is Flat'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인 뉴욕타임스의 토마스 L. 프리드먼은 제목대로 '세계는 평평하다'고 말한다. 자원은 비교우위의 원칙에 따라 세계 어느 곳에서든 나뉘고 만들어지며 합쳐져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리라.
예를 들면 저임금 국가인 인도의 시골마을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2천500명의 콜센터 직원들이 중국에서 만든 델 컴퓨터의 부품을 한국으로 보내라는 통화를 하기도 하고 인도 현지의 세무사들이 연간 40만명이 넘는 미국인들의 연말정산을 대행해 주는 식이다.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이란 위의 예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 같이 서로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지향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분명히 장점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세계화의 멋진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은 훨씬 복잡하며 심각하다. 특히 자유무역협정이 양보하기 힘든 기존 이해 관계의 틀까지 바꾸려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8차 협상을 앞두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타결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
무역구제(미국의 반덤핑규제), 한국 자동차 관세 인하, 개성의 한국 원산지 인정, 농업 개방 등 핵심적인 문제들이 차후의 고위급 회담에서도 불발되면 결국 이를 제외한 나머지만 인정하는 '낮은 단계의 FTA'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필자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서비스 분야 및 정부조달 부문의 개방요구는 상당 부분 접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 하다. 미국의 연안해운 개방은 힘들고 미국에서의 전문직 비자쿼터 면제도 어려움이 있으며 6천억달러가 넘는 미국 지방정부의 조달시장도 열리지 않을 것 같다.
접근 전략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있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와의 조약에서도 연안해운은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안도 우리에 대한 미국 측의 곤란한 요구(예를 들면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를 거절하기 위한 도구로 좀 더 포괄적으로 연계했어야 했다.
또 한가지는 상대방의 의중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가 TPA(무역촉진권·부시 정부가 의회로부터 협상의 전권을 받은 것)를 연장하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그들이 더 궁하다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베티 서튼 등 민주당 일부 미 하원의원들은 오히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세미나를 열며 딴죽을 걸고 있다.
우리도 '정 안되면 못한다'는 식의 배짱을 보일 필요가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이 허겁지겁 이뤄졌다는 비판을 거울 삼아 피할 수 없다면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도 서서히 준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화를 통한 폭발적인 부의 축적은 중국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상하이 주가의 폭락이 전 세계를 황사로 덮으며 'NYSE got Shanghaied' (뉴욕증권거래소가 상하이발 폭격을 당했다)는 신조어가 나왔다. 시가 총액이 한국보다 약간 큰 중국 증시가 촉발한 이번 사건은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가늠하게 된 계기다. 중국은 현재까지 세 차례 자유무역협정에서 동아시아 인접 국가에 영향력을 강화하며, 자원을 싸게 많이 얻으려 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왔다. 투자 및 서비스는 뒷전이었다.
참고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최근 밝힌 대중국 FTA 전략에는 우리 산업의 선 고부가가치화, 우리 현지 기업에 대한 투자보호, 중국의 비관세 장벽 단계적 철폐 등이 포함돼 있다. '평평한 세계' 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달릴 수 있는 동력을 갖기 위해서는 더욱 더 페달을 밟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