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윤진 대한건설협회 인천시회 前 사무국장
민주화정신으로 6·3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주역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통과되자 전국적으로 6·3동지회결성대회를 청주, 대전을 시발로 하여 앞다투어 개최하고 있다.
6·3학생운동 43주년 기념강연회에서 김호일 한국기술원 원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을 했다. 1964년 6·3학생운동은 한국과 일본간의 수교회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위항쟁을 전개하여 6월3일 비상계엄령에서 절정을 이루고 다음해 8월 위수령에 의하여 종식되었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었다. 더욱이 일본과의 회담은 국민의 호응과 동의를 얻지 못하고 통일이 전제되어야 할 민족분단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진행되었고, 회담과정에서 취한 군사정권의 굴욕외교가 학생층과 국민의 분노를 사 이에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시위운동에서 시작하여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회담을 강행하는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1964년 6월3일 서울의 대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전국적으로 10여만명의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 회담 반대와 독재정권의 퇴진을 외치면서 4·19를 방불케 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학생들을 해산시키고 1천여명의 학생들을 체포 연행했으며 이 중 주도 학생 60여명을 내란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대학생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65년 4월부터 한·일 협정 가조인 반대 투쟁과 6월의 한·일 협정 조인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조인되자 한·일 협정 비준반대투쟁과 8월의 한·일 협정 비준무효화 투쟁과 함께 매국국회해산을 내걸고 격렬한 시위항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8월26일 군사정권이 위수령을 서울 일원에 발동, 무장군인을 학교에 난입케 하여 사실상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종식되었다. 그는 또한 6·3학생운동의 성격에서도 6·3학생운동은 민족주의운동으로서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군사독재정권에 의하여 추진되던 한·일 회담은 굴욕적 저자세 외교의 산물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36년동안 그들의 지배통치를 받던 한민족에게는 일본은 원수였고 상대할 수 없는 국가이며 이러한 그들이 우리민족에게 합당한 사죄도 하지 않았고 배상도 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있어 민족적 감정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적대적 행동의 표출이 학생들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더욱이 그 회담내용에 있어서도 청구권문제, 어업협정문제, 재일동포 법적지위문제, 정신대문제, 독도문제, 문화제반환문제, 전시수탈보상문제, 역사기술문제 등 어느 것 하나도 만족스럽게 합의된 것이 없었다.
회담내용에 대한 불만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전 민족적 수치이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학생계층이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1964년 6월3일, 전국적으로 10만여 명, 서울에서는 5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굴욕회담 반대'와 '군사정권 퇴진'을 외치다 1천200여 명이 체포되고 2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중상을 입은 학생 1명은 사망했다. 6·3 데모로 구속 중인 학생은 224명이었으며 그중 60여 명은 학생신분으로서 '내란죄'로 군사법정에 섰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3~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학교에서 제적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제 6·3학생운동 학생에 대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정기국회를 통과하였음으로 42년전의 그 열정을 되살려 남은 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국 각 시·도별로 6·3동지회가 결성되고 있다.
인천에서도 6·3학생운동 당시 주역이었던 우림종합건설(주)의 탁연복 회장이 6·3동지회 이재오 회장(국회의원)으로부터 인천지부 결성준비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이달 22일 오후 2시에 문학 컨벤션센터에서 결성대회를 갖게 된다는 탁연복 준비위원장은 이제 행사준비는 모두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쪼록 성공적인 대회를 마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김윤진 대한건설협회 인천시회 前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