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일이다. 회사에서 직원들 야유회를 간적이 있었다. 장소는 직원 중에 시골 출신이 있어서 그 직원의 고향인 동네로 가는 것으로 했다. 차로 3시간 정도 되는 거리인데 외곽도로를 타고 목적지에 갈 때까지 경치와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해 야유회에 나온 것에 대한 기쁨으로 저마다 주변 경치에 푹 빠진 느낌이었다. 점심때가 돼 회사에서 마련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일행은 장소를 제공한 직원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노부부가 고추 농사를 크게 짓고 있으신데 일손이 모자라서 그런지 다 익은 고추를 제때 따지 못해 대부분이 골거나 더위에 짓물러 썩어 떨어질듯 보였다. 그래서 안타까운 맘에 직원들은 바구니와 포대를 달라고해 각자가 잘 익은 것을 골라 따서 한 군데로 가져오기로 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까? 고추 딴 것을 모으는 과정에서 깜짝 놀랐다. 일행 중에 부장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따온 고추는 빨갛고 잘 익은 것이 아니라 크고 파란 고추뿐이었다.
그 당시 모두들 한바탕 낄낄낄 웃어 넘겼지만, 부장님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았을 땐 뭔가 말할 수 없는 본인만이 아는 마음의 상처와 고뇌가 엿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였지만 그분은 선천성 색맹이셨던 것이다. 색맹은 색의 맹인이라던데 그 당시 얼마나 수치감과 모멸감을 받으셨을까?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정상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고 불편할까 생각해본다.
지하철 승하차와 계단 오르내림, 대중버스나 택시를 타고 내릴 때, 공공장소 편의시설과 문화시설 이용 등은 장애인에게 몹시도 불편할 것이다. 최근에야 장애인 배려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종전보다 관심이나 편의면에선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직 많이 미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우연찮게 길을 지나다가 옛 부장님을 만났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 분의 손을 덥석 잡고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하시는 사업은 잘 되시나요?" 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신다. "명예퇴직을 할 당시엔 뭐라도 다 할 것만 같았는데 막상 뭔가 하려니 그리 쉽지가 않더라"고 하신다. "퇴직금과 가진 돈으로 음식점을 차렸지만, 직장 경험만으론 음식점을 운영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고도 하신다. 결국 계속 적자를 메울 수가 없어서 몇년 전에 그 사업을 정리하고 얼마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 경비에 취직을 했으나 현장 공사가 다 끝나 지금은 또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 저기 알아보고 계신다고도 하신다.
찻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나오면서 몇 년 전 고추 딸 때의 그 분의 그 안타까웠던 생각에 잠시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그 분과의 헤어진 미련이 계속됨을 느끼고 있던 차에 교통신호등이 저 멀리서 깜빡 깜빡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차 하며 "참 저게 있었구나! 하며 얼른 휴대폰으로 그 분에게 전화했다. "부장님 전데요, 부장님 운전 면허증 가지고 계시죠? 운전을 하시면 어떨까요?" 일방적으로 말을 했다. 그러자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 분은 답을 하신다. "말씀은 고마우이. 하지만 난 그것을 할수가 없네!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으나 난 색맹이네…."
"아 그러세요.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군요!" 하며 얼른 도망치듯 인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있노라니 뭔가 가슴 답답함이 느껴졌다.
만인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던데 왜 현실은 그러하지 않을까? 우매한 자문자답을 하며 가슴 한 부분 앙금이 맺히는 듯 하였다. 색맹자도 운전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나 생각을 해 본다. 분명 어떤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신호등 색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도형으로 구분하게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꼭 원형의 적색·녹색·황색 신호등만 하라는 법은 없잖은가?
적색은 원형, 녹색은 세모, 주황색은 네모로 만들면 색맹자도 운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연구하여 구분과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조규택 회사원·인천 남구 학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