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꿈-최복내 인천상수도본부 남부수도 팀장
최복내 인천상수도본부
남부수도 팀장
오후 6시면 겨울의 짧은 해는 벌써 어두워진다. 분주했던 사무실의 일과가 하나씩 서랍에 잠겨지면서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공인이 문을 닫는다. 우리같은 하잘 것 없는 샐러리맨으로부터 위로는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공인이 손을 털고 문을 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체 속에서 공인과 사인의 한계를 명확히 구별 짓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퇴근이라는 시간에서부터 우리는 일단 사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세상의 아내들이 생각하고 바라듯이 하루일과 중에 가정을, 아내를, 살림을 생각하는 남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욱이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의 남편이라면 가정의 어떤 초미지사(焦眉之事)가 아닌 바에는 그를 온통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분주한 공인의 두뇌뿐인 것이다. 사무실을 나서서 정문 앞에서 동료들과 흩어질 때 이미 거리에는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바야흐로 휘황한 불빛의 홍수속에 드리워진 완숙한 서정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은 시간인 것이다.
조금은 감성적이 되고 조금은 우울한, 그러면서도 하루를 무사히 마친 자의 달콤한 해방감 때문에 조금은 흥분되어 있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육중한 건물이나 빌딩 속에 꼼짝없이 갇혔던 하루가 아니었던가. 그 뿐이랴 수인(囚人) 아닌 그 수인의 공무 속에서는 현대사회의 온갖 비정한 사연들이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이 서류로 오르고 서류 속에다 푸른 눈을 반짝이며 현대사회의 획일주의에 저항하는가 하면, 아라비아 숫자의 질서 있는 정렬 속에는 물질만능의 철학이 군림하는 것이며 서민의 감각과는 먼 거대한 산업사회가 찬란한 기품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꿉놀이나 다름없는 샐러리맨의 초라한 가정, 이러한 가정에서 가장의 위치란 것도 우습거니와 자신의 가정에 거대한 현대사회의 단애에서 자신이야말로 실오라기에 매달린 생명이라는 것을 절감해야하고 한없이 무력한 자신에 대하여 깊은 혐오를 들어낼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불현듯 자신이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아침 출근 때에는 그래도 새로운 하루를 맞는 명랑한 생기로 하여 희망의 눈길을 보낼 수 있다. 흔들리는 버스 속 또는 위태로운 택시의 물결에서도 곧장 직장으로 향하는 그 긴장은 살아가는 억센 의욕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어스름한 귀로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루의 공기, 어둠이 아닌가.
따라서 자신의 소중한 하루도 청춘도 모두 소모돼 식어버린 차가운 어둠인 것이다. 이쯤되면 사회참여, 사회봉사의 명분하에 우리의 가여운 인생은 여지없이 거덜이 난 것이고 남은 것은 피로에 젖은 자신의 몰골뿐인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초가삼간의 행복이나 음풍농월의 멋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도 낡아서 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고달픔의 귀로에서 샐러리맨들은 방황하고 술집으로 카페로 전전한다. 사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따분한 것도 없다.
세상의 아내들이 아이들의 뒤치닥거리나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지쳐 남편의 귀가만을 초조하게 기다릴 시간인데도 남편들은 그들의 욕구를 전혀 엉뚱한 곳에서 풀기가 일쑤다. 이렇게 가장들이 가정으로 직행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는 풍습은 그것대로 마땅히 규탄해야 되겠지만, 이러한 경우일수록 역시 필요한 것은 현숙한 아내들의 요령있는 조정솜씨일 것이다.
일견 목매기가 없는 송아지 같아 보이는 남성들의 행위에 대하여 그 핵을 잡고 있는 것은 역시 여성이 아닐 수 없다. 첫째로 아내는 이렇다 할 용건도 없이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의 습관적 징후가 보이면 일단 병으로 간주할 것이다. 병자에게는 따뜻한 위안과 사랑이 건강인보다 더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때 일수록 우리는 생활인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무언가 감동을 줘 심기일전의 의욕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명한 주부의 지혜일 것이다. 어스름한 퇴근길, 거기엔 샐러리맨들의 우수가 있고 낭만이 있으며 탈선도 있는 것이다. 슬픔의 강을 건너듯 우리는 매일 거리를 건너서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 사회가 아무리 기계화되고 비정의 세계가 되더라도 아늑한 꿈과 사랑과 안식의 보금자리인 가정은 우리의 영원한 요람인 것이다./최복내 인천상수도본부 남부수도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