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룡 칼럼-논설고문
세파에 부대낀 2006년 캘린더가 나흘을 남기고 마른 잎새처럼 걸려 있다. 달도 차야 기우는데 연초의 작심(作心)이 어느 정도 채워졌는가 되짚노라면 못다 한 부끄러움이 앞선다.
얼마 전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회상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택했거니와 "짙은 구름이 가득 끼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어의가 딱 들어맞는다. 답답할 땐 소나기 한번 시원히 내렸으면 후련하겠건만 실상은 바람 잘 날이 없는 세밑 정국은 먹장구름에 마른번개가 이어 치는 꼴이다.
그렇지 않아도 상생정치의 실종, 대통령의 리더십 부재로 불만이 쌓이는 판국에 그도 모자라 명색이 나라 '웃어른'들이 불편한 심기를 마구 쏟아 놓고 있으니 더욱 짜증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어버이 뜻을 어긴 자식에겐 훈계가 따라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화나도 마음을 가라 앉혀 절제된 언사로 타일러야 하거늘 다듬지 않은 표현으로 물의를 빚는대서야….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민중의 마음 읽기에 소홀하면 민중 역시 그를 불신한다. 따라서 자기에게 섭하게 했음을 꾸짖기 앞서 스스로 못다 한 부족을 반성하는 것이 순리라는 지적이다.
교계의 '고백의 기도'에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하였음을 뉘우쳐 가슴 치며 내 탓으로 통회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어찌 종교뿐이겠는가.
스스로 힘이 모자람을 뉘우치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의 부족을 탓하는 겸양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포용력의 시발이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 나라 현종(玄宗)에 얽힌 고사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태생이 총명했음에도 뒷날 강직한 성품의 한유를 재상으로 기용하고는 면전의 간언조차 낯을 붉히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가신들이 왜 한유를 내치지 않느냐고 하자 "나는 참느라 몸이 말랐다지만 천하백성이 살찌지 않았는가?"고 반문했다니 가히 태평성대의 현군답다.
다만 현종도 양귀비(楊貴妃)의 치마폭에 놀아나면서 총기가 흐려졌는데 이는 양귀비의 오빠를 재상으로 앉히면서 간신들이 득세한 탓인, 즉 동서고금 그릇된 인사가 문제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상호보완의 협력작업이다. 비록 자기 맘먹은 대로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민중의 신뢰를 거뒀다면 좌절감이 아닌 희열을 느껴야 함이 순리다.
무릇 신뢰란 거울과 같아 한번 금이 가면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다. 부부의 갈라섬을 뜻하는 파경(破鏡)이 그렇거니와 상호신뢰의 결핍은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남기는 법이다.
이점에서 남의 귀감이 될 어른의 자세란 자신에게 향한 지탄의 소리를 고깝게 여기기에 앞서 상대적으로 끼친 상처를 내 탓으로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성찰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실학자 이익은 "기울어진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엎어진 것은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망한 것은 회복될 수 없다"고 한 것은 신뢰기풍의 황폐화를 경고한 일깨움이다.
지금에 이르러 남은 여백에 미련을 걸어 본들 이미 엎지른 물이다. 하지만 "엎어진 것은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살리기 위해 지금 지체말고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나흘 지나면 새해를 마지 할 것을 생각하면 더도 말고 이 순간이야말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징검다리가 아니겠는가 함이다.
나만 살고자 바삐 나서 되돌아보지 않는 앞날은 시행착오의 반복이 예견된다. 따라서 미구에 울려 퍼질 제야의 종소리의 깊이를 새겨 볼 마음의 여유를 지니기 바라는 충정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사의 한 구절에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Tomorrow is another day…)"고 했다. 부디 새해는 권모술수의 대선(大選) 광풍이 휘몰아치지 않는 훈훈한 분위기가 저마다 가슴속에 조성되기 바라는 세밑 여백의 기구인 것이다./김경룡 칼럼-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