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성자유기고가
집은 광주에 있고 직장은 목포에 있어 매일 버스로 출퇴근을 하는데, 해 짧은 늦가을 퇴근길 어둑한 버스안에서 많은 생각들은 꼬리를 무는데, 그중 인천에서의 생활이 주종을 이룬 것을 보면, 삶의 청춘기인 20~30대를 꽉차게 보낸 탓일게다.
일전 인천 '동구문학회' 회장님의 연락을 받았고, 요지는 11월 9일 '가을 동구문학제'에 참여하라는 거다. 동구를 떠나 목포에 온지도 벌써 3년이나 됐다. 문학제 소식은, 퇴근길 버스안에서, 살았던 고향 인천과 다시 고향일, 살고 있는 목포와의 관계성 그리고 문학의 정체성을 새삼 곱씹어 보게 했다.
인천과 목포의 역사성, 공통점은 뭘까.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항구의 도시라는 점, 하여 바다를 통한 외침을 막고자 했던 시기는 다르지만 인천에는 화도진이, 목포는 만호진이 각각 설치됐고, 두 곳 모두 근대도시의 첫 발을 내딛게 된 동기가 서구 열강들의 문호개방의 압력이 정점에 달한 1800년대 후반기(인천 1883년, 목표 1897년)의 '개항'이었다.
사실 개항이 타의에 의하다 보니 개항장 주변과 거주 용의한 지역은 죄다 일본인들과 외국인들 거주지와 시설이 들어서게 됐고, 한인들과 개항장의 일자리를 찾아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도시외곽인 산기슭에 터전을 마련해야만 했다.
목포는 박화성의 '추석전야'를 보면 "목포의 낮은 보기에 참 애처로웁다.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다시 유달산 밑을 보자. 집 돌틈에 구멍만 빤히 뚫려진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인천 수도국산 역시 현덕의 단편소설 '남생이'에서도 살필 수 있듯, 목포 유달산 달동네와 대동소이한 궁핍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또 있다. 이미 해금됐지만 아직도 논란 중(?)인 인천이 낳은 천재 극작가 함세덕 얘기로, 공교롭게도 함세덕의 생애속에 인천과 목포가 함께 들어 있다.
함세덕은 1915년 인천 화평리(화평동)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해, 부친이 목포부청에 공무원으로 발령받게 돼자 목포로 이사한다. 1923년 목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로 전학한다. 인천으로 돌아온 이유는 부친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상업에 손을 대면서 부터다.
당시 어리기는 했지만 목포의 바다와 항구의 체험은 함세덕 작품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고, 인천으로 이사와 거듭 접한 항구의 풍경들은 드디어 한국문학사에 희귀한 어촌문학의 결실을 맺게된 결정적인 문학적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동구 화평동 455번지에는 퇴락한 함세덕 생가가 남아 있다.
이미 내 안에서 하나가 된 인천과 목포의 바닷바람 속에서 '문학의 정체성'을 묻는다. 문학제를 통해 반가운 지인들을 만나 그간 안부를 묻고 소줏잔으로 재회의 정을 나눔도 사람사는 일 중 으뜸일수 있겠다 싶지만 '문학과 문학제'를 통해 문학인으로서의 소명도 생각해야 할 것인데 문외한이 "문학의 정체성이 이것이다"는 외침은 내지못하나 "문학은 이러해야 한다"라는 몸짓은 있다. 그건 "아픈 현실을 바로 보라"이다. 얼마전 읽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김명인 저)' 중 '지성의 문학을 기다린다'에 또렷한 답 하나가 구해진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과 현실의 본질을 읽고 그를 통해 그 사물 및 현상과 자기 자신과 전체세계와의 관련을 깨치며 그 깨침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헤아리고 또 그 헤아림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진정 우주와 세계와 운명을 맞대면할 수 있다."
개항장 인천과 목포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화 정책에 따른 농촌 수탈로, 몰락한 농민들이 이주해 정착한 피눈물 겨운 터전이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슬픈 역사는 반복되는 건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수탈은 마지막 남은 농민들마져 다시 도시 빈민으로 내몰고 있다. 그렇다면 피폐한 농촌과 도시 빈민의 삶이 내 삶과 다름 아님을 깨치고 이를 하나로 묶어 어찌 상생케 할지를 고민하고 사회에 환기시키는 역할이 바로 문학의 정체성은 아닐까?/김철성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