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변신한 방송인 이상벽
 언젠가는 풍덩 뛰어들고 싶었던 세계였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수한 빛깔들의 바다. 사람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사진’이 오래 전부터 그에게 ‘눈부신 유혹’의 손짓을 보냈다는 것을. 신비로운 빛의 포착은 그가 수십년 전 부터 잡고 싶었던 파랑새이기도 했다.
 “사진은 자투리 시간으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제 모든 것을 쏟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안될 것 같아서요.”
 방송인 이상벽(59)씨가 마이크 대신 ‘FM2 카메라’를 손에 쥔 이유는 예사롭지 않다. 베테랑 방송인의 관록에 치장하는 액세서리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처음 펜을 쥐던 시절, 처음 마이크를 잡던 초발심으로 그는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다.
 거침없이 누비는 인천과 경기도의 산과 들. 낮, 밤이 따로 없고 눈, 비도 개의치 않는 하루하루. 이제 그는 TV에서가 아닌 밭고랑 한 가운데서, 또는 수풀을 제치고 불쑥 나타나 “허허허 안녕하세요, 이상벽 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의 아름다운 모델은 ‘나무’다. 나무는 그에게 형제나 친구 같은 존재다. 농협에 다니던 아버지는 나무를 자식들 이상으로 애지중지 돌보았다.
 “나무들이 모여 있는 풍경을 가만히 보면 사람들 사는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지 모릅니다. 어떤 나무들은 가족처럼 오손도손 모여 있고, 어떤 나무들은 연인처럼 속삭이고 있지요.”
 그는 그렇게 나무에서 삶을 발견하고, 인간 삶의 모습을 덧씌운다. 나무에는 표정도 있다.
 “얼핏 보면 그저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난 나무로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럼 그 나무가 미소를 짓든, 울음을 터뜨리든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모든 나무는 보물”이라고 확신하는 그의 어조엔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있다. 그렇다고 나무를 클로즈업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소재가 되고 태양, 초원, 집, 들녘 등 그의 작품 속에선 나무를 중심으로 세상의 만물이 은은한 빛깔로 한 데 어우러진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사진엔 그림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색이 있어요. 회화로는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빛깔이지요.”
 사진을 본격 시작한 때는 지난 2월.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더 늦으면 안되겠다 생각하던 차에 그는 최병관(56) 사진가를 만났다.
 “최 선생님은 세계적인 사진가이시잖아요? 함께 다니면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사진은 저 보다 선생님이시지만 바라보는 인생의 지점이 비슷하고, 정서도 다르지 않아 참 좋습니다.”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성에서 자란 그는 소래포구가 고향인 최 작가와 잘 통한다고 말한다. 서해안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느껴지는 공간적 유대감, 예술을 향한 열정과 그것을 완성하려는 부단한 노력, 약속, 책임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최 작가는 그에게 소중한 벗이자,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 다가온다.
 이상벽씨의 사진 사랑은 40년 전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익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할 때 그는 2년 정도 사진학을 공부했다.
 “신문기자로 시작해 방송생활을 하면서는 ‘예사랑’이란 사진모임을 만들었어요. 가수 전영록 김세환, 권투선수 홍수환이 모두 우리 회원들이었지요.”
 아마추어 경력이긴 하지만 그의 사진 나이테는 족히 20년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방송을 아예 떠난 건 아니다. 얼마간, 만족할 때까지 사진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 뿐이다. ‘아침마당’과 같은 정규프로그램은 당분간 접었지만, 특별방송엔 간간이 출연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군대장교, 신문기자, 방송아나운서 등 이제 날카롭고 예리한 직업은 해볼 만큼 해 본 터, 오래 전부터 꿈꾸던 예술을 완성하고 싶은 게 그의 속내다. 이전의 직업이 생활이었다면, 사진촬영은 자아실현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
 “가수 나훈아가 그러더군요. 우리 같은 사람은 운동도 맘대로 하고 예술도 하니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 친구는 현재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
 과거엔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방송이란 직업에 싫증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진을 하면서는 방송인 덕을 톡톡히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진을 찍으려면 남의 밭을 들어가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밭 주인이 혼비백산해 쫓아들어오지요. 그렇게 노발대발하다가도 제가 모자를 벗으며 안녕하세요 하면 저를 알아보고 더 많이 찍으라고 격려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사진의 세계에 푹 빠진 이 씨의 계획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개인전시회를 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향인 북녘 땅에서 자라는 나무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그는 현재 ‘나무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하다. 사진에 현장 느낌이나 소회를 적은 책이다. 사진을 어느 정도 완성한 뒤 다시 방송을 한다면, 사진을 소재로 한 ‘TV갤러리’와 같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싶다는 국민아나운서 이상벽씨.
 “찰칵”.
 2006년 8월1일 오후 2시30분쯤, 세상에서 단 한순간 밖에 없을 그의 모습이 빛을 머금은 채 필름에 새겨졌다. /김진국기자 (블로그)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