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세로 세상을 뜰때까지 드미트리 드미트리에비치 쇼스타코비치는 레닌상을 받은 소련최고회의 의원으로서 충실한 공산당원으로서 저명한 국가적 공인으로서 시민예술가로서 그의 전생애를 소련음악의 발전과 사회주의 인도주의 국제주의 이념을 구현하는데 바쳤다’
 1975년 8월14일 브레즈네프를 필두로 비밀경찰두목 국방상등이 참석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장례식에서 발표된 소련정부의 추도사 귀절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그의 사후 서방세계로 건너가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을 발표한 친구 솔로몬 볼코프는 말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9일 죽어서 도망쳤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 그는 1906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출생한 옛 소련의 작곡가로서 죽어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25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졸업작품 제1교향곡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악단에 이름이 알려지게 했다. 그러나 34년 발표한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이 사회주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맹비난을 받고 4번교향곡 마저 공연을 취소당해야 할 만큼 체제의 위협을 받던중 교향곡5번으로 겨우 명예회복했다.
 37년 교향곡5번의 초연때 연주가 끝나자 청중의 기립박수는 실로 광란이었다. 40분이나 계속되었다. 기가질린 정부당국자는 슬며시 꼬리를 감췄다.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교화와 개선”이라느니 “공산주의와의 타협이냐 항거냐”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의 반대파 조차도 “이제는 나조차 스탈린 정권하에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한 진혼곡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의도는 명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좀더 일반적이고 명료한 음악적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 교향곡5번은 이를테면 “아버지의 영웅교향곡”이라고 했다.
 오늘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5번은 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연주되는 교향곡의 하나로 꼽힌다. 그것을 인천시민들은 13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종합문예회관에 마련되는 거장 정명훈에 의한 공연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