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에도 도가 있다. 즐기는데에도 도리가 있고 지킴이 있을테니 이것이 조도(釣道)이다. 그래서 진정한 낚시꾼을 조사(釣師)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수도승과도 같다. 옛날 장지화(張志和)라는 낚시꾼은 낚시는 즐겼어도 미끼는 달지 않았다. 강태공은 아예 곧은 낚시를 드리웠다. 고투끝에 낚은 큰 고기를 상어에게 빼앗기는 노인 낚시꾼의 이야기를 쓰면서 헤밍웨이는 자기 극복으로 죽음과 대결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제시한다.
 이런 류의 낚시꾼으로는 불우한 왕자 월산대군(月山大君)도 꼽을수 있다. 그는 ‘추강에 밤이 드니…’로 시작되는 시조 한수를 남기고 있다. ‘추강(秋江)’이 지금의 어디쯤인지 알길 없으되 지금처럼 늦가을이었을 듯하다. 낚시는 드리웠으되 고기는 아니 물고 결국 빈배로 돌아온다. 하지만 고깃배에는 달빛이 가득하다.
 이런 태공들에게는 낚시의 즐거움이 잡는데에 있지않고 기다림에 있다. 잔잔한 수면에 떠있는 찌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잡념은 사라지고 무아의 지경에 빠진다. ‘취적비취어(取適非取魚)’란 말은 낚시를 드리웠으나 고기를 낚으려 함이 아니라 근심을 잊으려 함이라는 뜻이다. 현대어로 말하면 ‘자연도 낚고 건강도 낚는다’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낚시의 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낚시터 주변은 주변대로 어지럽고 꾼들은 그들대로 시끄럽다. 수면엔 비닐 조각이 떠있고 단체로 밤낚시를 즐기고 간 자리는 쓰레기 더미요 성능 좋은 전자기기의 볼륨과 주정꾼의 아우성이 시끄럽다. 최근에 생태하천으로 가꾸어 수질이 맑아진 장수천에 조차 낚시꾼이 지나간 자리는 영낙없이 어지럽다.
 낚시꾼들이 버린 쓰레기로 유수지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보도이다. 한 환경단체가 강화도의 저수지 서구지역의 유수지 등을 돌아보며 조사한 결과 그들의 주변정리 의식이 아주 낮았다고 한다. ‘낚시금지’ 안내문을 외면한채 쓰레기를 버리거나 태운것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낚시터는 낚시꾼이 찾는 곳이다. ‘낚시금지’는 결국 자신들로 인해 얻은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