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에 발간한 ‘평동성결교회70년사’에는 20여명의 월미도 조난사고를 기록하고 있다. 1934년 조개를 채취하러 갔던 부녀자들이 썰물때 배가 침몰하여 전원이 익사했다는 비사이다. 귀가하느라 작은배에 초과승선하여 참극을 빚었던 것인데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34년이라면 충분히 제방 육교가 가설되어 있었을 시기인데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방향이 그럴뿐 월미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50∼60년대 까지만해도 인근 만석동 해상에는 바지락을 캐는 아낙들이 작은 전마선을 이용 조개 채취를 나갔었으니 말이다.
 월미도가 교량으로 육속화한것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4년 무렵이다. 일인들이 인천역에서 소월미도까지 연장하는 군용철도를 가설하느라 목교를 그해에 준공했다. 지금도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목교 위를 통과하는 기관차의 사진이 남아있다.
 그러나 오히려 선박 왕래를 방해하자 철거하고 대신에 폭 2m의 석축 제방을 쌓았다. 인천은 연중 북서풍이 불어오며 이로인한 풍파를 막을뿐 아니라 북쪽에서 유입되는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월미도 까지 석축 제방으로 잇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리고 월미도내에는 한바퀴 회주하는 도로를 조성했다.
 그곳에 완전한 제방도로가 연장된 것은 1922년이었다. 오늘의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까지 1㎞구간에 2차선도로로서였다. 그러나 2차선이라고는 하나 제방폭의 절반은 불럭 보도요 나머지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차도였다. 이곳으로 해서 버스도 전쟁말기에는 관광마차도 지났다.
 다시금 제방을 좌우로 매립이 시작된것은 60년대초였다. 월미도를 향해 좌측으로야 항내이지만 북측으로는 광활한 공장지대가 들어섰다. 하나 그것으로 월미도의 풍광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시멘트 불럭 담장을 하느라 항구의 모습도 볼수없고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을 뜯어내고 철제 펜스를 쳤어도 별로 나아진게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곳에 자리한 6개업체들의 협조로 2㎞구간에 미관 담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걷고 싶은 거리’로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