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백년사’ 화보의 역대목사중 김기범목사가 특히 눈에 띈다. 초대와 2대의 아펜젤러 조원시는 서양인인데 3대는 우리 의관의 김목사이다. 사진이 시사하듯 김목사는 한국인 최초의 목사요 내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이다. 그는 1903년부터 2년간 7년부터 3년간 내리교회를 담임했다.
 김목사는 1869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상업차 인천에 있던중 기독교인이 되었다. 내리교회 전도사를 거쳐 신학회 전도사 과정을 이수 원산에 파송되었다가 190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조직한 엡웟 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여 해체당한 일도 있다.
 그가 목사가 된 직후 ‘신학월보’ 1901년 6월호에 실린 한국인목사의 의의는 이러하다.
 ‘이번 연환회의 제일 긴요한 일은 대한 전도사중에 김창식과 김기범 양씨를 선정하여 성품주심이니라. 대개 우리 대한예수 각명교회중 전도하는 선생이 많되 그중에 목사품 있어 세례줄 권세와 혼례행할 권세와 성만찬 베풀 권세는 다만 서양 목사에게만 있더니 지금부터 대한 형제도 또한 이 권세중에 세례와 혼례행함을 서양목사와 동행할수 있느니라…’
 또한 1898년 9월7일자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는 그의 활동사항이 실려있다.
 ‘동으로 이십리 되는 담방리촌에 다섯번 가서 전하였으며 서로 이십리 되는 영종섬에 두번 가서 전하였으며 동북간으로 사십리 되는 부평 김포 등지에 네번 가서 전하였으며 북으로 일백사십리 되는 강화 등지에 다섯번 가서 전하였는데 외처에 전도하려 십륙차 내왕에 전도말을 들은 사람은 육백육십삼인이오니…’
 김목사는 1920년 3월27일 별세했다. 역시 내리백년사에는 그의 장례행렬 사진도 실려있다. 만장을 앞세운 상여가 싸리재를 오르는 장면이다. 그의 후손으로는 영화학교 출신의 이대 사범대학장을 지낸 김애마 박사 등이 있다.
 16일 내리교회에서 김기범 목사 흉상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김흥규 목사가 “김목사의 안수로 자립적이고 토착적인 복음화의 생명이 움텄다”고 말했듯 그는 시대의 선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