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8일에는 가아 계송이 학도군을 조직하여 대·중생 2천8백여명을 통솔하고 백설이 분분하던 날 도보로 원로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장하게 여겼다. 한편으로는 영영 못만날 것 같아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73년판 ‘인천시사’에 실린 이열헌옹의 6.25를 회고한 수기이다. 그는 혼란했던 당시 사회질서를 수습하느라 활동한 지도자이며 인천상업중 재학중이던 계송은 1.4후퇴때 인천시내 학생들로 학도대를 조직 입대케 한 인솔자였다.
 당시 인천의 학생들은 조국의 위기에 스스로 학도대를 결성 뛰어 나섰다. 타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사례였다. 흰눈이 흩날리던 1950년 12월18일 축현초등학교에 집합 그날 저녁으로 출발 다음날 수원에서 열차편으로 대구로 해서 부산 마산에 도착한 그들은 해병으로 혹은 육군 등으로 입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중공군의 춘계공세에 맞서 많은 희생을 냈지만 무훈도 혁혁했다. 전선이 안정된 후에는 지리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선무공작도 폈다. 그리고는 빨치산이 된 동향의 같은 또래들을 구출했다는 사례도 전한다.
 이들보다 하루 앞서 당시 17세였던 한 학생은 인천을 떠나 경남 통영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날자와 시간으로 표시하고 있다. 출발일은 단기4283년 12월17일라고 했으니 서기로 1950년이다. 역시 축현초등학교에서 였다.
 ‘▽17일 오후5시 인천 출발 ▽18일 오전4시20분 안양 도착 ▽18일 오후1시5분 안양 출발 ▽18일 오후5시30분 수원역 도착 ▽19일 오전9시30분 수원 출발 ▽19일 오후9시30분 양지 도착 ▽20일 오전8시20분 양지 출발 ▽20일 오후6시30분 죽산 도착 ▽21일 오전9시30분 죽산 출발 ▽21일 오후6시 충북 음성군 감곡면 도착 ▽22일 오전5시 감곡면 출발 ▽22일 오후5시15분 충주 도착 ▽23일 오전7시5분 충주 출발 ▽23일 오후7시 문경 도착’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듬해 즉 1951년 1월2일 마침내 경남 통영에 닿는다.
 인천학도의용대 전사자및 작고회원 합동추모제가 18일 자유공원 호국기념탑에서 치러진다. 의로운 죽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