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진 중진병장 이기준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1856년 용유도 을왕리에서 태어났다. 1875년 운양호 사건때 19살의 나이로 중군병사가 되어 영종진 남문을 수비하고 있었다. 우리 군이 전멸되다시피 한 와중에도 그가 거느린 병사중에 부상자가 전무 지휘력과 지혜가 인정받았다. 그는 21세때 향시에 합격했으며 다시 2년후에는 무관 시험에도 합격 영종진의 무관이 되었다. 99년 주간신문 ‘영종신문’에 연재되었던 ‘영종용유 소사 시리즈’의 내용이다.
 영종진의 유명무명한 무공자들은 더 있다. 운양호 사건때 영종진 첨사는 도주하느라 정신을 못차려 훗날 해직되어 유배의 신세가 되었지만 35명의 전사자를 내고 16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사자들에게는 나라에서 장례비를 지급했다고 한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의 약탈때는 첨사 신효철이 활약했다. 약탈자들은 도주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로로 그는 영전했다. 신첨사는 그 이전에도 효심이 지극하고 청백리로서 관리의 사표가 되어 나라에서 백미 10섬과 돈 1천냥을 특상한 바 있다. 이훈익옹의 ‘인천지방 향토사담’에 나온다.
 오늘의 국제공항이 좌정한 영종도의 본래 이름은 자연도였다. 이곳에 남양부의 영종진이 1653년 옮겨옴으로써 영종도가 되었다. 그러나 영종진의 위치는 자연도의 본도가 아니라 동쪽의 구읍(舊邑)이라 불리던 별도의 섬이었다. 1663년 주민을 동원 연륙교도로를 공사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듯’ 자연도 전체가 영종도가 된 것이다. 지금도 원래의 위치 화성군 서신면 용두리에는 구영종(舊永宗)이니 영마루이니 하는 이름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남양만에서 이전해온 그해 방어영으로 승격한 영종진은 운양호 사건때까지 200년간 군사 요충지였다. 방어영사 3동과 객사 1동 창고 3동 태평루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운양호 사건때 파괴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이 영종진을 복원하여 호국정신을 되새기자며 운양호 사건이 있었던 9월22일을 매해 추모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