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때이다. 결과가 궁금했던 예루살렘 지사가 한 장군에게 물었다. 장군은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인구 비율이 40대1이니 이스라엘이 승리한다고 장담했다. 실제의 비율로야 아랍인이 백배는 더 되었을터인 만큼 장군의 답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아랍인이 한명이라고 할때 이스라엘인은 40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장군은 전쟁의 승패가 반드시 인구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기꺼히 죽겠다는 청년이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랍과의 전쟁때 마다 조국을 위해 싸운 이스라엘 청년들의 무용담은 지금도 신화 처럼 전해진다. 아랍인들이 전쟁을 기피하여 외국으로 떠나는 어느 공항에서든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 청년들의 귀국행렬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66년 전쟁때도 그랬다. 이스라엘은 염전사상이 짙었을때이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목줄인 아카바만의 티란 해협을 봉쇄하자 해외여행중인 이스라엘인들의 귀국사태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각지에서 귀국하는 이스라엘인을 수송할 항공기가 대혼잡을 이루었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자랑할 일은 못된다. 우리도 그와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6,25전쟁때 우리의 많은 학도들도 전선에 뛰어 들었다. 특히 재일학도와 청년들의 참전 지원은 조국으로 달려간 이스라엘과 다름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가 재일교포의 자제요 유학중의 학생들이었다. 메이지 와세다등의 재학생들이었으나 학업을 포기 떨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장한 뜻이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당초 법적근거가 없다고 거부되기도 하고 교포의 경우 종전후 재입국의 보장도 없었다.
 참전한 지원병은 모두 644명-군번도 계급도 없이 용전했다. 60명 전사 87명실종이라는 손실도 냈다. 휴전후 268명이 귀환하고 226명은 돌아가지 못하고 언어까지도 불편한 낯선 땅에 잔류 고독한 생활을 해야했다.
 지난주 29일 수봉공원의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탑에서 참전기념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