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5일 오전 10시. 이 땅의 사계 중에 가장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오색 무지개가 갈랐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의 영결식장에서 카메라에 잡힌 이 장면은 조계사 인터넷 사이트에 소개되고 있다.
 잘 알려졌듯 스님들이 입적하면 법구를 불에 태우는 전통적인 다비식이 불교계의 오랜 관행이다. 그러나 근자에는 유구를 수습하는 과정의 사리 추출에 온통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가장 엄숙하던 종교적 전통 의식을 엑스트라를 동원한 재현 이벤트와 혼동하는 이들이 늘면서 그 권위는 예전 같지 않다. 하긴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타도 앙시앵레짐’이 21세기 벽두 대한민국에서 극성을 이루고 있다는 논란도 있는 만큼 오즉 하랴마는.
 혹 스님의 결단마저 봉건 구습과의 절연이라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선전이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법장 스님이 법구를 기증하면서 치러진 영결식은 우리 사회 전반에 무언의 감동을 낳았다. 억만금의 기부가, 서릿발의 질타가 이보다 설득력일 수 있을까. 마침 이 땅의 지도층들이 화려한 이력의 장막뒤에 숨어 ‘뒷돈 거래’로 국민을 속여 온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즈음이어서 특히 그렇다.
 티벳에서도 소위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는 시신 수습 전통이 있다. 자신의 몸을 새에게 주어 하늘로 영혼을 나르도록 한다는 장의 문화로, 윤회의 사슬을 끊고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버리는 점에서, 호화로운 유택을 남기는 우리의 세속에 비해 남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후 장기를 기증하면서 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떠나겠다는 의지에 비하랴.
 평생 스님이 염원했고 몸을 훌훌 벗어던질 때 떠나고자 했던 지향지는 어느 곳일까. 불교의 세계관으로는 불법에 귀의한 이들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수미산일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다고 보았고 그 높이는 80만㎞라고 상상했었다. 이런 우주관에서 비롯된 수미산으로 지목되고 있는 산이 바로 히말라야의 고봉준령 가운데 자리잡은 ‘카일라스’이다. 산 정상으로부터 사면의 절벽 경사를 이루고, 얼음과 눈으로 봉우리를 칠해 놓아 마치 금강석을 깎아 놓은 듯한 ‘카일라스’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모두 세계의 중심축인 성산(聖山)으로 여긴다. 지구의 중심축이자 우주의식과 합일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 센터라고 한다. 6천700여m의 높이에 둘레 55㎞에 이르는 ‘카일라스’는 티벳인들이 자벌레처럼 엎드려 기면서 경배를 하는 전신투지(全身投地)의 대상으로 유명하다. 산을 한 바퀴 돌려면 걸어서 3일, 전신투지로 20~30일이 걸리는데, 한 바퀴의 순례로 금생의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인도나 티벳인들이 평생을 두고 순례를 계획한다. 20세기 말에 들어서는 달라이 라마를 위시한 많은 티벳 승려들이 언어 능력을 갖추고 해외로 진출하면서, 티벳 불교에 심취한 서구인들의 ‘카일라스’ 여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카일라스’는 ‘마나사로바’ 호수를 두르고 있다. 스님도 마나사로바에서 마지막 몸을 씻고 카일라스로 들어갔을 지 모르겠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짧아 귀성을 포기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했든 비록 마음으로 나마 고향에 다녀왔든, 대부분 사람들은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이유를 말할 수 없으나 몸과 마음은 고향의 산천과 피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또한 고향을 떠올리면 정수리에서 발끝에 이르기 까지 긴장이 이완되는 느낌을 갖는다. 언제나 돌아가고픈 고향,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고향.
 그렇다. 금생의 회귀점은 고향이다. 종교에 귀의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카일라스’가 고향인 것이다. ‘마나사로바’는 고향집 앞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다. 고향을 찾을 때와 떠날 때 서로 나누던 그 감정은 종교적 희열에 버금간다. ‘카일라스’라는 순례를 통해 금생의 죄업을 씻듯 고향 방문은 그 동안 도시 생활로 거칠어진 마음이 정화되는 기회였다.
 어깨가 무겁게 내려 앉은 남편을 격려하고 명절 차림에 애쓴 아내를 위로하면서 ‘나의 카일라스’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은 법구 기증을 통해, 우리는 가족과 이웃 사랑을 통해 똑같이 ‘카일라스’를 지향하는 동반자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