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될 전망이다. 인터넷매체에 기고한 글 가운데 ‘6·25는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 주장한 것이 이번에도 ‘딱 걸린’ 것이다.
강 교수는 이미 4년 전인 2001년 여름 북한을 방문,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을 이룩하자”는 내용의 문구를 쓴 죄로 호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준엄한 법률 용어로 ‘상습범’인 셈이다.
강 교수의 수난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꽤 다양하다. 이른바 보수우익 진영의 격렬한 성토와 비난은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자칭타칭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의 견해도 크게 엇갈린다.
제법 ‘열린 시각’을 가졌다는 이들 가운데 다수는 강 교수의 이마에 ‘순진한(낭만적) 통일지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심지어 ‘돌출행동’이라는 ‘미필적 고의성’을 인정해 봐주자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한다.
반면 강 교수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세력은 발언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적극적 옹호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일상에서 강 교수의 주의·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글과 발언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좀 뜻밖이다.
그들 역시 강교수의 글과 발언을 ‘돌출행동’ 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강교수로서는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눈으로 평가하자
필자가 아는 한 강 교수의 수난은 ‘미필적고의’가 아니다. 그의 일련의 발언과 글들은 평생 학자로서 그가 진술해온 발언의 연장선 위에서 어긋남이 없다.
강 교수는 수 많은 북한연구자 가운데 북한 사회에 대한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을 채택한 연구자다. 외부적 잣대가 아닌 ‘그들의 시각’과 ‘그들의 기준’에 따라 ‘그들의 사회’를 연구해온 것이다.
이는 특수성이 강한 북한사회를 한국사회의 기준과 잣대로 재단하고 평가할 때 언제나 ‘부정’과 ‘모순’이라는 같은 답만 나올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학자 강정구’ 나름대로의 연구방법론이다.
실제 강 교수의 연구방법론은 상당한 성과를 낳았다. 북한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인 주체사상이 현실에서 제도화되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파헤쳤는가 하면, 개인 숭배와 권력 집중화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기도 했다.
모두들 각자 만든 잣대로 ‘그들’을 재단할 때, 그들의 논리와 사상을 바탕으로 ‘내재적 비판’을 가하는 것이야 말로 북으로서는 뼈아픈 비판일 수 있을 것이다.
폭력 앞에 무너지는 양심
최근 문제가 된 글 역시 학자 강정구의 이같은 시각의 연속선 위에 쓰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인천 자유공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맥아더 동상 철저를 둘러싼 진보·보수 진영의 감정적·물리적 대립 양상은 소모적인 것이다. 그는 소모적 갈등을 멈추고, 근대적 이성의 회복과 합리적 논의를 시작할 것을 주문했다. 문제의 글에서 “욕설이나 비방이 아니라 상응하는 차분한 반론을 기대해 본다“는 당부도 담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토론은 커녕 욕설과 비방 수준도 훌적 뛰어넘어 그를 아예 다시 철창 안으로 가둬버릴 태세다. 그의 진술 맨 앞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장벽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으며, 그 뒤에는 북한에 관한 한 어떠한 우호적 진술조차도 ‘폭력몰이’와 ‘색깔몰이’로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이 군복과 훈장 등으로 무장한 채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학자의 학문적 양심과 신념 체계조차도 국가는 제도적 폭력으로 억압하고, 일부는 이를 ‘폭력몰이’와 ‘색깔몰이’로 짓누르는 야만이 지배하는 사회. 더욱이 우리 사회의 상당수가 이같은 야만성과 폭력성을 보면서도 크게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국민’이니 ‘참여’니 하는 정부의 수식어가 몇 번을 바뀌어도 이처럼 어두운 그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송경호 경기본사 제2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