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흥모 경기본사 정경부장
말 잘하는 여자,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한 마디 했다.
“앞으로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해야 한다.”
보도내용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국민의 지식수준이라든가, 학력 형태를 볼 때 대학을 다닌 경험이 있는 분이 이 시대에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발언은 노대통령의 학력 컴플렉스 운운하며 수위를 높여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손학규 경기도지사측의 반응이다. 김성식 정무부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 대변인의 말을 ‘망언’으로 규정했다. ‘국민과 한나라당의 거리를 더 멀게 하는 말’이라며 대변인직의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모름지기 차기 대권주자군 가운데 학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득을 볼 사람은 손 지사다. 서울대를 나오고 옥스포드를 졸업했으니 어디 내놔도 꿀릴 데 없는 학력이다. 대선주자는 물론이요, 전 국민을 상대로 해도 보기 드문 학벌이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의 학력기준보다 대변인의 학력기준을 먼저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변인이 한 망언을 유학파 정치학 박사측에서 상식대로 바로잡고 있으니 말이다.
전대변인은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여러 사람 인물평도 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을 일컬어 ‘열혈청년’이라 했고, 손학규 지사는 ‘여전한 대학교수’라고 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아나운서 같은 기자’,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은 ‘이상주의자’라고 촌평했다. 박근혜 대표는 큰 그림을 보는 데는 ‘타고난 천성’이 있는 것 같다고 극찬했다.
촌평 가운데 나머지는 좋은지 나쁜지 금방 알겠는데, ‘여전한 대학교수’와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는 알쏭달쏭하다. 있는 대로만 보자면 대학교수나 이상주의자는 모두 좋은 얘기지 나쁜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정치적 수사쯤으로 여기자면 아무래도 수상쩍다. 굳이 여전한 대학교수라는 말이 정치인이 되고서도 공부를 많이 한다거나 젊잖다는 뜻인지, 아직도 정치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에 비하면 이상주의자란 평가는 확실히 냉소적 표현 같다. 정치인으로서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 아닌가 싶다.
풍자 축에도 못간다. 품위도 잃고 균형감각도 잃었다. 그래서 막말이지만 한 가지는 짚어야겠다. 정치인들의 말 말이다. 이쯤하면 단순한 실언은 아니다.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뚤어진 가치관이 정치인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로는 언제나 ‘국민, 국민’ 입에 올려도 보스 앞에만 서면 어느새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당파적 이해관계는 상식을 지배하고, 권력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격하되 풍자가 없고, 품위가 없다. 그래서 늘 정치인들의 말을 좇다보면 어느새 본질은 사라지고 추잡한 싸움만 남는다. 말 싸움하다 안되면 결론은 언제나 나이 따지고 앉아있는 꼴이다.
정치인들에게 이상이, 이상주의가 이렇듯 조롱받을 수 있다니. 병치고는 중증이다.
당파적 안목에 젖어 있는 한국정치는 확실히 이상결핍증에 걸렸다. 얼마전 총리와 경기도지사 사이에 벌어졌던 정치고수 논쟁이 또한 다름이 아니다. 이상이 없으니 수만 남지, 꿈이 없지. 수 중에도 꼼수밖에 없는데 비전을 보여줄 수 있겠나. 차제에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말의 품위를 되찾기 바란다. 왕조시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젊잔 떨라는 얘기가 아니다. 본질에 육박하는 언어로 시대에 접근해 달라는 얘기다. 특히 정치인들의 언어는 그들이 속한 집단과 시대의 이상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에게 현실감각이 중요하다 해서 이상이 없어도 된다고 누가 말하나. 정치엔 이상주의자도 항상 있어야 하고, 이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균형이 있어야 한다. 조화돼야 한다. 정치가 조정(調整)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통령을 뽑는데 대학 기준이 신념이라 했던가. 신념? 그렇다면 김성식 정무부지사의 충고는 유효적절하다. 그토록 경직되고 편파적인 신념을 소유한 자라면 필시 ‘당과 국민을 멀게’ 할 것이다. 이상을 조롱하는 정치인들에게 정치(政治)는 곧 정치(正治)라고 했던 성현의 말씀은 또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것인가. 위대한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는 공자님도 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