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으로보는 북녘땅

단동에서의 이틀째-본격적인 북행이 시작된다. 시내를 벗어나자 이내 구련성(九連城) 터에 도착했다. 멀리 일인들이 세웠다는 러일전쟁 기념첨탑이 아직도 남아 시야에 들어오고 압록강 지류의 다리를 건너 한마을에 「애하첨고성지(촪河尖古城址)」라는 비석이 나타난다. 언저리가 어지럽다. 아이들의 운동화를 비석에 기대어 널고 줄을 걸어 빨래를 말리고 있었다.

 이곳이 연행길의 조선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도착 첫밤을 보내던 곳이다. 여기서 사신들은 숙영을 했다. 그때의 장면을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청 고종 건륭제의 70수축하 연행길의 그가 지나면서 적은 1780년 6월24일자이다. 그러나 한겨울에 이곳을 지나던 조영복(趙榮福)의 기록으로는 몹시 춥고 삭막했었던듯 하다. 박지원보다 60여년 앞서 동지사의 부사로 이곳을 지나며 기록한 「연행일록(燕行日錄)」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해가 질때 구련성에 도착하니 만상의 군관이 막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뒤에 서장관이 인원점검을 마쳤는데 역관들의 개인 복물이 뒤따라 도착했다. 그리고 정사의 막사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가 파했다. 정사의 막은 소위 몽고의 취막(퀡幕)이었다. 나와 서장관의 막은 개가죽으로 만든 작은 막으로 땅구덩이를 파고 두개의 화로에 불을 피고 불가에 나무 상을 덮어서 잠자리를 설치하여 밤이 깊으면 불을 바꾸었다. 이불속 만큼 따뜻하여 방안과 다름없으나 사면이 매우 성기어서 차가웠다.』

 숙종45년(1719) 음력 11월4일 서울을 출발. 20여일만에 압록강을 도강하던 한겨울의 같은달 26일자 일기이다.

 고생스러웠던 우리 선조들의 여행길을 잠시 회상하면서 다시 북상, 명대의 만리장성 최동단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도착했다. 안내판에는 명나라 성화5년에 축조했다고 씌어있다. 성화는 명나라 9대 헌종의 재위시 연호요, 1469년의 일이니 당시 무주공산이던 요동벌을 확보한후 장성을 연장해서 건설했겠다.

 1992년 복원했다는데 연장 700m 높이 6m 규모로 본토의 장성만은 못하나 위용은 갖춰져 있으며 험준한 능선을 따라 건너편 절벽에서 성벽은 멎는다. 골짜기 그늘의 붉은 진달래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마을 복판에서는 우리와 같은 5일장이 열려 북적대고 있었다. 한바퀴 돌아보니 상품은 의류 신발 식기류 육류 야채 어물 그리고 과자류와 아이스크림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호산에서 충격적인 장면은 바로 발 아래가 북한 땅이라는 사실이다. 장성을 본후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자 작은 도랑이 있고 그 건너가 거짓말처럼 북한의 섬 어적도(於赤島)라는 것이다. 불과 2~3m나 될까. 첨벙첨벙 건너갈 수 있을 거리이다. 중국어의 경고 간판이 서있고 밭가는 농부가 연신 쳐다보는 품이 아무래도 감시인같아 보인다. 멀리 북한측 초소는 기척이 없다는 설명이며 그 섬에 북한주민 13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압록강변을 돌아보면서 아쉬운 중에도 한가지 위안이 되었던 점은 곳곳에 보이는 섬들이 우리 영토라는 발견이었다. 압록하구, 이를테면 삼각주에 산재한 도서는 모두 124개인데 거의가 우리땅이란다. 강의 본류나 중간지점으로 국경을 획정하지 않고 아무리 폭 좁은 지류라도 그 남쪽을 모두 우리땅으로 지켜준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곳 일대는 열하일기 이후 불과 50~60년에 나라의 쇄국을 뚫고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서양선교사들이 밀입국을 시도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19세기초 이곳 만주땅 압록강변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기회를 엿보면서 어쩌다 한국인을 만나면 손에 성경책을 쥐어주고 전도했다. 우리나라 초대 신부 김대건도 1842년 겨울 이곳 어느 지점에서 입국을 시도했던 일이 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나무꾼으로 변장한 그가 멀리 의주를 바라보면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몇번이고 얼음이 꺼질뻔 했으나 결국 도강에 성공한다. 지금 그가 서성거리던 지점은 정확하게 어디쯤일까.

 멀리 의주의 통군정이 보인다. 관서팔경의 하나인 통군정은 옛 의주성의 북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일행의 심정을 짐작못할 물오리들만이 물장구를 친다. 압록강변에는 유난히 오리가 많다. 주민들이 놓아 먹이는 놈들인데 도로를 횡단하는 오리가족들로 인해 몇번이고 버스를 멈추어야 했다. 『물빛이 오리 대가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는 「당서(唐書)」의 내용을 상고한 열하일기가 연상된다.

 호산성에서 멀지않은 태평만(太平灣)댐에 도착했다. 단동시와 수풍댐 사이에 중국측이 건설한 댐으로 중국이 관리하는 1천1백85m 길이의 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아볼 수 있는 곳이다.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땅은 북한이지만 중국에서 임대사용하는 치외법권적 지역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북한쪽을 밟는 유일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상류의 수풍댐에는 중국측 강안까지 북한이 관리한다고 한다.

 비록 철책으로 나마 중국령이 그어있고 그 밖으로 언덕에 북한 초소가 있다. 우리를 내려다 보던 병사 두명이 성큼성큼 걸어 내려와 우리와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눈다. 나이는 23, 24세 일행중의 동갑내기 대학생과 악수를 하면서도 같은 나이로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다는 이야기에 역력히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미화와 중국돈 그리고 담배 볼펜을 얻어 들고서 물러갔다. 상부에서 형편을 모를리 없을텐데 아무래도 외화벌이라도 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었다.

 태평만 댐은 8ㆍ15 이전 일본인들이 기공했다가 물러간후 중국에 의해 87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댐의 종사원은 무려 3천명-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등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인구는 5만명.

 다시 버스는 북상을 서둘렀다. 강변의 비탈을 깎아 새로 도로를 개설하느라 사정이 말이 아니고 위험천만이어서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일제때 비행장으로 조성했다는 섬-장전 하구촌(長甸 河口村)에 닿았다. 1939년 북한과 연결토록 가설했다는 교량은 6ㆍ25 당시 폭격으로 단절된후 방치되어 있어 청성단교라 칭한단다. 전쟁중 신의주 철교보다 이곳으로의 중공군 이동이 더 빈번했다고 한다.

 영농 시범촌으로 그리고 관광지역으로 개발하느라 비교적 정결하고 정돈된 마을이다. 늦은 점심식사후 유람선으로 북한측의 강변을 살폈다. 건너편 북한쪽은 평북 삭주군 청수읍-끊어진 교량 좌측으로 길게 늘어선 흰 건물이 한눈에도 학교겠다는 짐작이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곳 인민학교라고 한다. 서울의 모방송국 사장의 어려서 모교라 해서 화제가 되었던 곳이다. 단교의 상류로는 청수철교가 있어 북한과 오갈 수 있으나 지금은 왕래가 중단되었다며 레일이 빨갛게 녹슬어 있을뿐이다. 다만 그곁에 중국측의 흰 세관건물 마당에 북한산 원목이 보이고 멀리 강 건너로 흰연기 피어오르는 북한의 공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유선에 실렸다. 하류로 한참이나 내려가니 주변을 단장한 기념비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독립운동 유적지란다. 옛날 우리 독립군들의 국내접촉 지점이던 곳을 김 부자의 우상화에 이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파른 언덕위로 도로인듯 군용 트럭이 지나고 이따금 병사와 아낙들을 스치면서도 태워주지는 않는 듯하다. 어쩌다 흰색 승용차도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압록강변에 머무는 동안 세차례의 유람선에 실려 강변을 돌아본 경험을 했다. 첫날의 단동에서와 두번째인 이곳 청성단교에서 그리고 상류인 고구려의 고도 집안현에서 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황폐한 산하를 바라보았다. 북한이 산을 모두 벌목, 다락밭으로 했다 함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60∼70도의 가파른 산자락을 용케도 옥수수밭으로 일구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주민들이 삼삼오오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면 더러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강변 곳곳에는 영락없이 집총한 병사들이 도사리고 낚시를 했는지 꼬챙이에 물고기를 꿰어 불에 굽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비탈에 혹 기진한듯 쓰러져 몸을 숨기고 있는 여인들-그들은 땔나무 다발을 중국측에 넘겨주고 겨우 담배 몇갑을 받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북한의 산들은 민둥산이요 그래서 멀리서 산의 수목이 있고 없고로 중국과 북한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일행은 내친김에 수풍댐에까지 이르렀다. 광복이전 우리나라 제일의 수력발전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1943년 당시 일제가 만주국과 합자, 세계적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완공했다. 길이 900m 용적 3백30만<&28351>에 담수면적 345㎢에 이른다. 대안의 북한땅은 역시 청수읍의 수풍동-물이 풍부하다는 이름이란다. 건물들이 반듯하고 낮은 구릉에는 선전표어가 보인다. 현재 압록강에는 4개소의 댐이 걸쳐있으며 북한과 중국이 2개소씩 소유한다고 한다.

 수풍댐에서 나와 관전현(寬甸縣)의 허름한 대리원주점(大利園酒店)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