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소외집단-섹스.일탈.저주
 ‘중세의 소외집단-섹스·일탈·저주’ (제프리 리처즈 저/ 느티나무 발간)

나뒹구는 낙엽들이며 거리의 나목들이 우리로 하여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한다. 사색에 잠겨 보기에 좋은 시기이다. 몇 년 전 이 무렵 필자는 한 친구로부터 소수라서 그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는 계절이 왔다는 말과 함께 ‘Jeffrey Richards, Sex, Dissidence and Damnation: Minority Groups in the Middle Ages’라는 외서(外書) 한 권을 건네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책을 같이 읽었던 유희수(고려대 사학과 서양 중세사 교수)씨와 필자는 다른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되어 그 역서 ‘중세의 소외집단-섹스·일탈·저주’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책은 중세사회의 소수 집단에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정신적 맥락과 관련지어 분석한 점에서 독특하다. 중세 유럽이 모든 측면에서 팽창하기 시작하는 1000년경이 지나면서 기독교 교회와 사회는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세계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지상사회를 정화하고 순수한 상태에서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제도적·영적 장치를 정비하였고, 새로 등장한 국민왕정과 자치도시들은 기독교 사회질서와 통일성을 세우는데 필요한 정치적·심성적 장치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하느님이 세워 놓은 자연 질서의 중심에 있는 ‘우리’와는 다른 ‘타자’의 정형화된 표상이 필요하였다. 기존의 종교적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이단자·마녀·유대인)과 교회의 성 규범을 벗어난 자들(창녀·동성애자·문둥이)인 ‘그들’은 권력의 중심이 쳐놓은 규범의 울타리 밖에 있는 저주의 물리적·영적 공간으로 밀려났다. 특히 교회는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음탕한 사탄의 하수인들이라는 악마적 이미지를 조작하여 그것을 민중들에게 선전하고 각인시켰다. 이렇게 날조된 악마의 정형화된 표상은 페스트가 만연하는 중세 말과 종교적 순수성 경쟁을 벌였던 근대 초에 이들 소외집단을 하느님의 분노를 달래 줄 당연한 ‘희생양’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저자인 제프리 리처즈(랭카스터 대학 문화사 교수)는 이 책에서 중세사회에서는 사회규범을 설정하고 이에 적응할 수 없는 자들을 규제한 것이 주로 교회권력이었고, 여기에 세속국가 권력이 12세기부터 점차 교회를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이러한 통제기제가 더 강화되고 섬세해지며 사람들의 심성에 자율적 기능으로 자리잡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다수만능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이 그들과는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 소수 집단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관한 지식을 넓히고, 그들의 동시대 문화에서는 그러한 소수집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독자들이 일독과 사색에 시간을 할애해 볼만한 책이다. /조명동.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