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영종도
 ‘멀리 강화도쪽에서 포성이 울린다. 얼마전 월미도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이 이내 강화도로 향하더니 초지진에서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다. 싸움이 격렬한 듯하다. 깃발신호로 전투상황을 접하니 매우 불리한 모양이다. 정산도 포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이다.
 사흘이 지났다. 가끔씩 여기 영종성을 공격하던 일본 군함이 본격적으로 상륙을 감행할 듯하다. 적 군함에서 2척의 작은배가 우리 진쪽으로 향해 온다. 사격을 시작했지만 멀리 일본 군함에서 쏘아대는 포탄에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60명 정도의 일본군이 성벽을 따라 올라 성내에 진입했다.이리저리 총을 쏘아대고 칼을 휘둘렀다. 작약도와 자연도 포대에서 함께 포를 쐈지만 일본 군함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투력은 크게 차이가 났다. 속수무책. 적의 맹렬한 공격에 어쩔 수 없이 영종진을 포기하고 자연도로 후퇴했다. 백운산에서 바라본 영종진은 온통 불바다다. 비명소리와 적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해풍에 실려온다. 적병 2명을 사살했을 뿐, 우리 군 35명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10여분이면 닿는 거리에 영종도가 있다. 지금은 바다를 매워 공항이 들어서 있는 국제적인 공간이 됐고, 주말이면 수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지로 탈바꿈했지만 암울한 우리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인 공간이다.
 1875년(고종 12년) 9월22일 이 곳에선 조선의 개국을 촉발시킨 운양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한강을 따라 서울(한양)로 가기 위해선 영종도 앞 바다를 지나 강화도를 거쳐야 했기에 영종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뱃길 곳곳에 포대가 설치돼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은 군인이나 그의 가족들로 추정된다.
 지금의 영종도는 바다를 메워 하나의 섬이지만, 당시만해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만세교로 이어진 2개의 다른 섬이었다. 영종도 선착장이 있는 곳이 ‘영종도’이고, 공항이 들어서 있는 곳은 ‘자연도’라 불렸다. 두 섬을 이은 만세교는 물이 빠지면 드러나고, 물이 차면 잠기는 ‘잠수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두 섬 사이 바다를 매립해 하나의 섬이 돼버려 만세교의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없다.
 자연도는 말을 풀어 키우던 곳으로 당시 4천명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다고 구한말 각종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들 주민들은 군인이나 그의 가족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영종도는 작은 섬으로 그 둘레를 성벽으로 쌓아 포대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도 포대와 작약도에도 포대를 설치, 삼면에서 공격이 가능하게 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양호는 한반도 서해안에서 중국 우장(牛莊) 근해까지 측량을 위장해 인천앞바다에 등장한다. 중국 우장으로 가기 위해 부족한 물을 채우겠다는 명목으로 영종도에 상륙을 감행하는 데 이 때 조선군이 포격해 싸움이 났다고 일본군은 주장하고 있다.
 최근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이 완역·발간한 ‘인천부사 완역본’은 당시 일본군 장교의 입을 빌어 전투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인천부사는 1934년 인천부를 관리하던 일본관리들이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기록서로 일본인들의 시각으로 인천항 개항과 그 이후 인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월미도에 처음 정박한 운양호는 19일 우선 강화도쪽으로 향한다. 초지진에서 첫 전투를 벌이고 정산도 포대를 점령한 운양호는 간헐적으로 영종성을 공격하다 22일 상륙을 감행하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영종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전투력에서 큰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하고 만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는 네덜란드식이었지만, 인천부사가 “대포알은 불과 한 발만이 군함위를 스쳤을 뿐, 그 외는 모두 군함까지 도달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 성능이 일본군에 크게 못미쳤다. 인천부사는 또한 “적(조선군) 35명 사망, 우리(일본군) 수병 2명사망…. 적의 도망자는 약 400∼500명”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노획당한 대포는 현재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 유취관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제국주의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인천(제물포) 개항을 서두르게 된다.
 당시 영종진의 모습은 지금 찾아볼 길이 막막하다. 영종성은 포대를 설치한 ‘외성’에, 군인들과 작전사령부가 설치된 ‘내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은 그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내성의 외벽이었을 가능성이 큰 ‘토성’ 일부가 현재 영종도에 남아 있다.
 흙으로 쌓아올린 ‘토성’은 이 일대 주민들이 밭을 일구고, 집을 짓기 위해 허물거나, 전쟁통에 파괴됐을 가능성이 크다.
 운양호 사건이 일어난 뒤 1년후 이 곳 주민들은 당시 사망한 35명의 넋을 기리며 위령제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마저 혼란속에서 끊겼고, 세월의 흐름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인천부사를 완역한 인천문화발전연구원 이병화 이사장은 “일본에 남아있는 대포 반환운동이나, 영종진 복원사업은 호국정신을 배양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그 이전에 우선 당시 전투과정에서 사망한 조선군에 대한 위령제를 우선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김주희기자 kimjuhee@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