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트오히 감독의 ‘리딕-헬리온 최후의 빛’은 빈 디젤이라는 터프가이의 매력과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승부수를 던진 영화다. 화면은 웅장한 스펙터클과 격렬한 전투 장면으로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줄거리는 잔인한 정복자와 이에 맞서는 영웅의 대결이라는 매우 상투적인 구조를 지닌다. 이른바 킬링타임용 SF 영화의 일종이라고 간주해도 크게 벗어나는 분류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고는 있지만 여기에 견줄 만한 내러티브의 무게감은 상대적으로 없다. 물론 침략자가 지배하는 곳의 모든 주민들의 개종(改宗)을 강요한다는 것이라든지, “죽은 자의 것은 죽인 자가 갖는다.”라는 대사는 마치 이라크전에 임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관객은 이 영화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풍자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로드 마샬이 이끄는 군대 네크로몬거는 행성들을 정복하며 모든 인종의 종교를 개종시킨다. 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내놓아야 한다. 네크로몬거는 평화의 행성 헬리온마저 피비린내 나는 파괴를 자행한다. 이에 맞설 수 있는 자는 퓨리언족의 마지막 후예인 주인공 리딕 뿐.
 재미있는 것은 네크로몬거 군대가 정복하는 행성마다 세워놓는 죽음의 조각상, 그리고 로드 마샬이 쓰고 있는 투구의 모양이다. 네 개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는 조각상과 투구는 분열된 정체성, 또는 인격의 다중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적 장치는 주제의식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주인공 리딕이 우주 최악의 죄수이자 최고의 영웅이라는 캐릭터 설정 정도까지이다. 안티 히어로서의 리딕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상투적인 구분법에 대한 성찰을 유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고민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쉬운 길을 택한다. 약간 모호한 형태의 권선징악.
 우리는 이미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 ‘브라질’ 등과 같은 SF 영화에서 화려한 비주얼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주제의식도 만끽한 바 있다. 이들 영화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영화가 단순히 오락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SF 영화는 미래라는 하나의 상징을 빌려 현재의 문제점을 고민해 보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SF 영화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암울한 미래상은 기실 현재의 심층에 숨어 있는 문명의 비극성을 은유하는 것이다. ‘리딕’이 부족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리딕’은 미래상을 통해 현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성찰하지도 않고,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고, 화려한 CG와 터프가이 주인공의 매력으로 관객에 다가선다. 그런 만큼 아쉽다.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 음향 등의 진보를 선전하는 공산품(工産品)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장인의 혼이 담긴 자기(瓷器)를 닮았다. 그것은 장인의 놀랄 만한 솜씨를 뽐내기도 하지만 장인의 깊은 사색의 결과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