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자본’ /인천대 경제학과 이갑영 교수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고전’ 읽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읽지는 않아도 장식장에 꽂아놓고 폼이라도 쟀는데 이제는 그마저 찾을 수없다.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삶에 의미를 주고 위로하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고전을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데, 일단 깨알 같은 글씨에 분량부터가 만만치 않다. 특히 불멸의 고전으로 알려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부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을 읽다보면 흥미는 고사하고 등장인물이나 동네이름조차 헷갈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 무더운 여름, 잠 못 드는 이웃을 위해 좋은 고전하나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읽기 시작해서 5분 안에 잠이 안 오면 책값을 변상해(?) 주고 싶을 정도로 효과가 빠른데, 졸음이 오면 즉시 베게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는 두께이다. 만약 읽어도 졸음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첫 장을 넘겨보면 그리 걱정 안 해도 된다. 한글로 번역되었지만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를 빼고 나면 쉽게 이해되는 말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설사 몇 장 넘어가더라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바로 맑스의 ‘자본’이다.
 날씨도 더운데 웬 ‘자본’ 타령이냐고 외면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하기는 ‘맑스나 ‘자본’ 말만 들어도 핏대부터 세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자본’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끝까지 읽은 사람이 흔치 않으며 내용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문 것이다. 배웠다는 사람들도 쩍하면 맑스나 ‘자본’을 들먹이며 유식을 뽐내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자본’은 바이블에 버금가는 파장을 몰고 왔는데, 정치적인 문제는 빼더라도 철학과 역사학 같은 인문사회과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자본’이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빨간책’이라는 분이 있다면 제발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을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유일한(?) 고전이다. 이런 ‘자본’이 역설적으로 5분 안에 졸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데도 숨이 가쁘기 때문에 그 이치를 파헤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니, 자본의 뜻에 따라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모두 영원하다고 믿는 이 세상을 뿌리부터 뒤집었으니 팔자가 사나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불온서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맑스가 말했듯이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일은 수행자나 학자들의 몫이 아니라 삶에 지친 사람들의 비상구이다. 만약 올여름에 ‘자본’을 읽는데 성공한다면 천기(?)를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무더운 밤에 쉽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올여름에는 맑스의 ‘자본’을 손에 들고 휴가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인천대 경제학과 이갑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