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섭의 음악이야기(31)
 상륙작전으로 엉망이 된 인천의 시가지도 피난처에서 돌아온 시민들의 재빠른 노력으로 조금씩 정돈돼가면서 하루하루 눈에 보일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거리도 많이 깨끗해졌고 포탄으로 부서진 집들도 원상복구는 어려웠으나 다가올 겨울을 대비, 가능한 한도내에서 저마다 수리를 하고 먹을 것을 위해 분주하게 일을 찾아다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창단된 지 얼마안되는 육군 경기지구 선무관현악단 연습도 날이갈수록 화음감과 리듬감이 제법 좋아졌습니다. 그해 10월10일쯤 수복기념 연주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레퍼토리라 해도 관현악곡 몇곡과 테너 백석두씨의 아탈리아 가곡 몇곡이 고작인 초라한 프로그램이었지요. 많은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관현악단 연주회에 힘을 기울여주신 분이 엄희철 대위로 육군 경기지구 선무공작대 장교였습니다. 훗날 1.4후퇴때 우리의 후송작전에 애를 많이 쓰신분으로 아마 지금쯤은 작고하셨으리라 추측됩니다만 맡은 일을 철저히 수행하는 장교였습니다.
 수복기념 연주회는 그런대로 끝났습니다. 청중이 초만원은 아니었으나 거의 좌석을 매울정도였고 청중들과 우리 연주자들은 진지하게 음악회를 마친셈입니다.
 음악회가 끝나고 청중 몇사람이 무대뒤로 와서 나에게 인천이 수복된 후 음악회를 평화로운 느낌으로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어서 연주소리가 배나 좋게 들렸다면서 자주 음악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볼품없는 연주회라도 두달에 한번쯤은 음악회를 열어보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했지요. 해서, 하루 이틀 쉬고 또 다시 다음 연주회 준비에 들어갔고 단원들과 연습을 계속 했습니다.
 어느날 나보다 두세살가량 어린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하고 있는 신흥동 교회 목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더니 인천 기독교구국 청소년 합창단을 조직했는데 지휘자겸 단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지요.
 오케스트라때문에 시간이 어렵다 하니 주4회 저녁에 연습을 한다고 햇습니다. 간곡한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승락을 하게됐지요. 다음날 저녁 연습장에 가서 소개를 받고 그동안 연습한 곡을 지휘해보니 의외로 화음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낮에는 오케스트라 연습을, 저녁에는 합창연습을 하다보니 내자신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 전쟁중 꽃다운 나이에 전사한 사람도 많은데…”하면서 두 단체의 연습에 몰두하기로 결심했지요.
 얼마후 인천기독교 구국청소년합창단의 시민위안연주회가 애관극장에서 있었습니다. 가을이라 합창단은 검은교복 왼팔에 ‘구국’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연주했습니다.베르디의 개선합창곡, 구노의 병사의 합창, 그리그의 몇몇 즐거운 멜로디의 합창곡, 마지막은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곡이었습니다. 레퍼토리도 고등학교 합창단치고는 수준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연주를 잘했든 못했든간에 청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격려해주었습니다.
 두단체의 첫 연주회는 끝이나고 다음 연주회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가을도 깊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 인민군과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뉴스를 듣게 된 것입니다. <계속>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