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에서 가장 길었던 그해 여름을 땅굴 같은데서 지내다보니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9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달래주는것은 미군 제트기의 날아오는 빈도가 아주 잦아졌다는것과 어머니의 정성어린 사랑뿐이었습니다. 머지않아 한미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것이라는 바람결 소식도 바람결에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음대 같은 학년 친구였던 김형주(당시는 테너)씨가 겁에 질린채 찾아왔습니다. 야채저장소인 땅굴에 들어오더니 건강은 어떠냐, 얼굴이 백지처럼 하얗네하며 남동쪽으로 가는 길에 들렸다고 말을하면서 “영섭이 나 죽을 고생으로 여기까지 오게됐네. 오다가 불심검문으로 직업학교까지 끌려가 의용군에 끌려가게 되어서 수송트럭을 기다리고 있는중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지. 그리고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작은 화장실 환기창을 넘어서 탈출한 뒤 자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찾아왔네.”
 작은 창문을 빠져나오느라고 어깨 허리쪽에 피맺힌 자국이 여러군데 있었습니다. 땅굴이 피난처라며 머지않아 인천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이 이뤄질것이라는 말을 전했습니다.보리로만된 밥을 찬도없이 함께 나누다보니 저녁무렵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몸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저녁길 남동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던중 9월14일이 되었습니다. 제트기가 여러번 궹음내며 종횡으로 날아왔다가 가곤하던중 정오쯤되더니 인천 앞바다쪽에서 펑하는 대포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한미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초포격이 시작된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그런 한포사격이 여러번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중 한발이 우리집 농장 건너편의 먼모리 마을 한복판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폭음의 요란한 음향을 지금도 나의 관현악곡에 상상을 하면서 ‘휘르테테시모’라는 표현기호를 쓰고 있답니다.
 밤으로 되면서 함포사격 소리는 요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겁도났지만 국군해병대가 반드시 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기만을 간절히 기도할뿐이였습니다. 밤 10시인가 11시쯤되니 포격을 피해서 인천시내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저 남동쪽으로 피난가는 것을 볼수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긴긴 하룻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나는 가슴뛰는 것을 억누르고 땅굴에서 나와 집쪽으로 왔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숨겨두었던 작은 태극기를 꺼내들고 시내쪽으로 가보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멀리 직업학교 뒷편의 낮은 산쪽을 보니 기다리던 한미연합군부대가 서울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것을 볼수있었습니다. ‘상륙작전으로 고생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고 싶었지요.
 먼저 다가가서 만난것은 미군해병대였습니다. 탱크위에 앉아있는 군인, 도보로 가는 군인, 장갑차를 타고 가는 군인, 짚차를 타고 가는 군인, 형용각색이였습니다. 그들에게 태극기를 흔들면서 “웰컴 유에스 마린코”라고 연발했습니다만 그들의 표정은 무표정했습니다. 환영나온 사람들을 의심 하는듯한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있는 것이였습니다.
 이윽고 국군해병대 군인들을 만나게되었습니다. “참으로 수고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발하면서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환영 나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늙은 분들과 어린이들었습니다. 젊은이는 저뿐이였습니다.
 한 해병대 상사쯤 되는 군인이 저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저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나서 젊은이는 어떻게해서 여기 환영하러 나왔느냐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땅굴에서 숨어서 피난했습니다.”라고 말하니 하얀 얼굴색을 보고 숨어지낸 것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나의 얼굴이 검게 거슬려 있었으면 그 해병대 군인은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로 인식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 군은 말했습니다. “지금은 상륙작전 수행중이니 위험합니다. 집안에서 며칠은 조심하면서 지내십시오.” <계속>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