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1주일도 안돼서 급기야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도 무참히 점령되고 요즘에 말하는 수도권의 중소도시도 인민군 수하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외곽지역 주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파리 왕립음악원에 유학해 드뷔시 같은 작곡가, 즉 한국의 드뷔시가 되겠노라던 원대한 포부도 일시에 사라진 느낌이고 친척과 친구들과의 만남도 끊어지고 마음에 그리던 여인도 사라지고 보니 김소월 시인의 싯구처럼 산산이 부서진 마음만이 남아 있을 뿐 멍하니 정신나간 사람처럼 나의 조그마한 방에 있는 라디오 앞에 허탈하게 앉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수도 서울과 주변 중소도시가 이미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는데도 라디오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계속 서울을 사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들은 국민들은 대한민국 국군이 그렇게 쉽사리 서울을 내주면서 후퇴할 수 있겠는가 라는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소문은 흘러흘러 정확히 수도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천이 점령되기 전날 부평 쪽에서 인천 시가지 쪽으로 인민군 탱크에서 쏜 포탄의 발사 폭음이 고막과 가슴을 찢을듯 요란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 건너편 길가를 보니 벌써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친구 김형주도 만나서 이야기도 할 겸, 과연 인천이 점령당했는 지 내 눈으로 확인코저 거리로 나섰습니다. 한 시간 반쯤 걸어서 인천 시가지의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가니 인민군 탱크가 밀어부쳐서 파출소는 흔적도 없이 파괴된 상태였지요.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습니다.
 친구 김형주(당시 테너 서울 음대생)를 그의 집에서 만나니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겁에 질린 표정이었습니다. 자기는 남동 쪽으로 우선 피란을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인민군 치하에 놓였으니 앞으로 북한처럼 음악동맹이 판을 칠 터이니 자내도 남으로 피란을 가든지 집에서 나오지 말고 난이 끝날 때까지 죽어 지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도 못한 채 다시 만나게 되길 바라면서 그 길로 걸어서 주안 농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나의 평생에 있어 가장 긴 여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말로는 인천이 점령되기 하루 이틀 전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몇 몇 음악인은 월미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고 인천에도 북한의 음악동맹처럼 인천음악동맹이 결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가나 음악을 전공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인천음악동맹에 가입하여 김일성 장군에 보답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습니다만 나의 예술, 관념, 인생관 등에 비춰볼 때 너무가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가입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고난의 길이 펼쳐질 것만 같아 불안하고, 광야에 남겨진 외톨이 인생처럼 자신이 불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 때의 안타까웠던 심경을 어찌 여기에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낮이나 밤이나 모두 어둠뿐이었습니다. <계속>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