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출생하여 인천의 창영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초·중·고교, 대학시절, 그리고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결혼해서 아들 셋도 얻게 되고 1963년까지 살았던 인천시대를 접고 당시 서울의 동아방송(DBS, 지금은 5공때 방송사 통합으로 KBS로 흡수됨)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편곡, 지휘자, 단장으로 발탁돼 떠나기 싫은 인천을 뒤로 서울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1963년까지 인천에서의 음악수업시절, 그리고 훗날 음악활동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당시의 인천음악사였기에 간략하게 몇 회 적어놓고 이 연재 기고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것이 써내려가다보니 내친김에 여러 회를 더 기술해 놓아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이 되니 독자여러분들이 지루하게 느껴질가봐 염려가 되는 바 적지 않습니다.
  그럼 다시 전호에 계속합니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 입시시험을 마치고 난 후 한 보름쯤 되니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경복중고 동창생들은 서울대 법대, 문리대, 연대법대, 정외과, 세브란스 의대 등에 합격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만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합격한 저의 마음은 그저 담담할 뿐이였습니다. 법대나 외대를 나오면 장래는 경제적으로 보장이 되는 일이나 나는 장차 서양음악 작곡가가 되어도 생활은 어려울 것이 뻔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에 합격이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성악과에 합격한 경복동기 한성진 군(피아니스트·한동일씨 삼촌·캐나다 이민·작고)도 나와 나란히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게 되니 대학시절 마음의 버팀목으로 될 가장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얼마쯤 지나고 보니 뜻밖에도 인천의 친구 김형주씨(제고출신·테너·훗날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로 전과)와 인고출신으로 기억되는 김종철씨(테너·6,25전쟁 후 음악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대성함)도 합격하게 된 것을 알게 되어 세 사람이 어울려 음대 시절을 보내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 여겨졌지요.
 그 때는 요즘과 달리 학기 초가 6월 중순이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의 경복중고 시절의 은사 임동혁 교수님이 서울대 작곡과 주임 교수 김성태 선생에게 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시게 되어 저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 1학년생으로는 감히 꿈도 못꿀 담당교수로 김성태 교수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상급반으로 서울대 음대 1기생 선배이신 현재의 작곡가 정회갑, 이성재, 김달성 선배님과 저의 동기인 이남수(훗날 서울대 음대 지휘과 수석 교수), 홍연택(훗날 국립고향악단 상임 지휘자·코리안심포니 상임 지휘자·작고)씨 등이 김성태 교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음대입시가 끝나고 나니 보다 중요한 첫 작곡 발표회의 개막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앞서 기술했듯이, 발표회 장소는 그 당시의 인천한미문화원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만, 행사 날짜를 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빡빡한 스케줄 틈바구니의 하루 저녁을 무상대여 받아 발표회를 여는 것이였기에, 결정되는 날짜를 통고 받기까지 초조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인천한미문화원에서 중요간부로 일하고 계셨던 피아니스트 최성진 선생이 애써 주신 덕택으로 결정된 날짜를 통고받으니 저의 작곡가 생활의 첫걸음 날짜인 1949년 6월4일이었습니다. 이 날짜는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계속>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