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그리고 그후...
  이 은 화
 
 오래 입은 옷처럼 익숙해진 가난이 어색할 리 없으련만, 낡은 흑칠판에 내 이름자를 발견하는 날에는 가난을 온 몸으로 감지해야 했다.
 공납금 미납자 명단에는 빠지지 않고 분기마다 올라가는 것을 습관처럼 지나치기에는 나의 무디어지지 않는 감성이 문제였다. 끌려가는 것보다 더딘 걸음으로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들어서던 교무실의 썰렁한 분위기는 나의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눈길을 줄 데 없어 눈을 내리 깔고 담임선생님 앞에 서 어찌할 바를 몰라 쭈삣거리던 내 손만 잡고 계셨던 할 말을 잊은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절망도 끝이 있었다. 끝 갈 데 없는 절망은 오랜 지병으로 앓으시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터널의 끝을 보았던 것은 오히려 더 이상깊은 나락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에서였다.
 우산과 같은 보호자를 잃고, 이제는 다시 주어진 낯선 환경에 익숙해져야 했던 모든 것이 나에게는 도전이었고 혼자 일어서야 하는 새로운 훈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희망을 읽어야 했고 모든 것이 닫힌 것이 아니라 아직 많은 기회와 길이 열려 있음도 보았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판도라 상자를 기억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가 받은 선물인 상자 안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절망과 죄악과 더러움이 있었다. 그 상자를 열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어긴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되고 절망과 의심, 온갖 더러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희망만을 남긴 채 상자를 닫게 되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이다.
 신화란 신의 옷을 입은 인간의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이 간다.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욕심을 상상이라는 출구를 통해 실현해보기도 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인간이다. 인간의 완전성이 거기 있다.
 이제 다시 판도라 상자에 남아 있는 희망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대구 지하철의 참사와 같은 끝없는 절망을 경험한 사회는 너나없이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
 분노와 좌절을 넘어 의욕마저 잃게 하지만 그렇게 날마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이 상자로부터 쏟아져 나와도 좌절과 우려의 이면(裏面)은 희망으로 읽어야하는 이유는 있다. 뼈저리게 경험했던 현실만을 생각하며 절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와 맞물린 이면에 새로운 삶를 위해 남겨진 것을 제대로 바라보면 판도라 상자 안의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화 / 수필가. 『수필과 비평』으로 데뷔. 제물포수필문학회, 인천수필시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