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기획취재부장 

근대로 접어들던 당시 유럽의 교회는 고민에 빠졌다. 신분이 사회의 근본을 이루던 세상이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자본이 곧 세속의 힘이었기에 교회는 부르주아 계급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정경일치의 세계에서 ‘부자가 천당을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기 보다 어렵다’는 논리를 폈던 교회가 느닷없이 부르주아들을 끌어안자고 나서는 것은 자가당착이었다.
 그러나 살기위해 교회는 논리적 변신을 꾀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살피사 만인은 평등하다. 어떤 방법을 통해 부자가 되었느냐가 중요할 뿐….” 신·구교간의 대립이 이어졌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르네상스에 이어 물적 토대의 변화에 따른 힘의 변동은 신성(神性)에 대한 개념도 변화시켰다. 세상이 뒤집어져 온통 난리가 났던 일이지만 지금 세상에선 ‘그랬었군… ’ 하는 정도다. 신이야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해석은 사람 몫인 셈이다.
 덩샤오핑(鄧少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이어 쟝저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세대의 중국이 마침내 자본가를 품어 안았다.
 중국 공산당 16차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공산당은 물론 정협이며 공식적인 각종 ‘자리’에 자본가의 등용이 시작된 것이다. 너나 없이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샤오캉(小康)을 위해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잡는 고양이가 중요하다는 논리적 변신은 정점을 맞은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본가가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으로 인정받는데 그치지 않고 정치권력의 심부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하기사 사회주의 중국이 지난 세월 비난해 마지 않던 제국주의 자본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투자를 이끌어낼 때부터 예견된 일이긴 하다.
 고속으로 성장하는 중국 사회의 체제내 모순은 새로운 논리적 변신을 통해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는게 중국적 변명이다. 속은 쓰리지만 그들은 변화만이 살 길이라는 걸 잘 안다.
 ‘자본가가 공산당원이라니…’.
 지하의 마르크스와 마오쩌둥(毛澤東)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 벌어져도 중국을 보는 세계는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다.
 혁명의 시대 앙상레짐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교조적인 해석으로 수구를 고집하던 무수한 집단과 계급들이 도태됐다. 과거의 변화는 생존을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오늘의 세계가 던지는 주문은 아예 ‘변화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다. 죽기 살기 식이었던 이데올로기 경쟁에 있어서도 이분법적 냉전의 시대는 갔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전형을 닮아가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수용한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일 것 같던 사안들도 절묘하고 기가막힌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게 자신을 살리고 조직과 나라를 살리면서 세계가 한걸음 진일보 하는 방법이라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진보와 보수간, 신·구 세대간, 지역간, 자본과 노동간, 수도권과 지방간, 메인스트림과 주변부간 등등의 각종 갈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시작도 하기전에 발목을 잡힐 일이 도처에 널려있다. 격려하고 박수를 쳐주는 일보다 눈을 부라리는 시선들이 더 많은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더 많은 보통의 눈들은 여전히 따뜻하다. 이제 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모쪼록 갈등을 끌어 안는 일이다. 포용과 상생의 논리적 변화로 미래를 향한 물꼬를 터줘야 한다. 물은 낮은데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