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주(遁走)
신경림

역사에서는 노숙자들이 여전히 신문지를 덮고 누워자고
지하도 입구에서는 다리 없는 노파가 오늘도 손을 벌리고 엎드려 있다.
대형 멀티비젼에서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이
가볍고 행복한 새 세상을 구가하고

청소부들이 모닥불에 검은 손을 쬐고 있다.
모두들 새 천년의 첫 해맞이를 위해 동해로 달려간
정월 초하루 청량리 역전에서

註)신경림 시집 ‘뿔’에 실린 작품이다.
둔주(遁走)는 도망쳐 달아난다는 뜻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만
현실은 현실 그대로다. 찬 겨울 더운 실내에 앉아 있다고
바깥 세상도 이처럼 따순 것은 결코 아니니….

<추천독자·김철성 kcs10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