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바위 모. /사진=김석훈

삼목에서 신도를 거쳐 마지막 장봉 선착장에 발을 내디디며 마주하는 장봉1리, 지금은 옹암(甕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독바위였지만 점차 한자화된 '독 옹(甕)', '바위 암(岩)'의 옹암으로 불리게 되면서 지금은 장봉도 지명의 대명사 격이 되었다.

지명인 말문고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국마를 기르던 국영 말목장이 있었고, 또한 110년 전통의 옹암교회가 있어 오랜 역사가 숨 쉬는 지역이며, 현재는 이웃 섬이나 육지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장봉도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장봉도를 찾는 시민이나 관광객이 독바위의 형태는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어디에 있을까? 현재 독바위는 있을까? 없을까? 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독바위 유래와 형성

질문에 대한 정답은 '독바위는 있다' 이다. 독바위 일명 옹암은 마치 독 같은 모양을 한 바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해안가 수많은 바위 가운데 독바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일반 사람들은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옹암해수욕장, 평촌 방면으로 이동하는데, 독바위는 반대 방향의 만(灣)으로 형성된 옹암포구와 작은 멀곳을 향하는 구름다리를 지나 장봉도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해당하는 뱀메기뿌리로 가면서 해안가의 모래사장에 우뚝 선 채로 위치한다. 독 혹은 단지,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지금은 많이 훼손됐다. 그 이유는 과거 이 일대에 곳배(일명 멍텅구리배)로 새우잡이 할 때 독바위의 돌을 떼어 닻(곳)돌로 많이 썼다고 한다. 이 독바위는 지형학적으로 씨스텍(Sea-stack)에 해당하는데, 오랜 기간 파도에 의해 노출되어 육지로부터 분리된 수직 기둥 모양의 연안 침식 지형이다.

많은 관광객이나 시민들이 이 바위를 지나갔으나 알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 지명이자 이정표 역할을 했으니 이제라도 작은 안내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 마을 형성

장봉도는 1910년대부터 어장으로 개척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는 장봉도와 동만도 사이의 새골, 서만도와 신도 사이의 중골, 신도 주변의 만도리 어장을 포괄하는 우리나라 3대 어장으로 불리던 곳이다. 1933년에는 해선망(醢船網)이 60여 척에 달했다고 하니 3대 어장을 실감 나게 하며, 이곳에서 잡았던 새우나 민어는 전량 중국으로 수출했다. 한편 이 당시 어민의 권익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1932년 북도면어업조합이 지정되었고 1936년 북도어업조합으로 개명하여 장봉도에 건립되었다. 1940년대가 되면 점진적으로 선박 수가 증가 추세에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50년 6·25전쟁으로 피난민의 증가는 어선 및 기타 선박의 증가로 이어지면서 작은 멀곳 앞의 옹암포구에는 선박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이후 해선망과 안강망 어업이 1980~90년대에 사라지기까지 어업의 발달이 지속하여 1971년에는 장봉항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편, 마을은 원래 옹암6촌이라 하여 큰 논골, 작은 논골, 장골, 옹암, 늘논, 검어지 마을이 있었으나 늘논과 검어지 마을은 사라지고 현재는 4개의 마을이 남아 있다.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은 큰 논골이며,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재복의 증조부가 용유도에서 입도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는 황무지였던 말 목장을 개간하고, 주민들이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하니 개척자라 할 수 있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